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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확실히 우리 사랑은 어느 단계를 넘어섰다. 처음 함께 식사할 때는 밥을 반 공기나 남겼었는데 말이다. 마주 앉아 밥을 먹다 말고 앞니에 고춧가루가 꼈는지 콧물이 흐르는지 눈곱이 꼈는지 얼굴이 번들거리는지 신경이 쓰여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줄줄 흘리고 먹을까, 씹는 음식이 보일까, 한 숟갈 천천히 퍼서 살짝 벌린 입에 겨우 넣고 입술을 앙 다문 뒤 꼭꼭 씹어 꿀떡 소리가 들리지 않게 조용히 넘겼다. 밥을 다 먹고 물을 마실 땐 입을 헹구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빠르게 삼키느라 사레가 걸릴 뻔한 적도 있다. 연락이 오면 일 분 내로 답장을 하느라 하루종일 핸드폰과 마주하고 있었다. 아침 여덟 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새벽 네 시까지 대화를 멈출 수 없어 몇 달 잠을 설쳤다. 그래도 서로를 생각하면..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 고향을 어디라 부르면 좋을까. 오랫동안 꿈에서 어릴 적 살던 아파트와 초등학교 주변을 배회했다. 당시 살던 아파트에서 학교로 가는 지름길은 아파트 담장을 넘고 저수지를 지나 야트막한 산을 타 넘는 거친 흙바닥이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초등학생들은 롤러 블레이드를 신고 아침에 모여 다 함께 산을 타러 가곤 했다. 롤러 블레이드 신은 아이들이 흙과 돌이 가득한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는 광경은 지금 생각해 보면 기이하고 아찔하지만, 당시 누가 더 멋있고 위험하게 바퀴 달린 신발로 묘기를 부릴 것인지 경쟁의식이 가득했던 초등학생들에게는 즐거운 일상이었다. 매일같이 아파트 담장을 넘는 아이들이 많아지자 결국 아파트 관리소에서는 담장에 안전하게 오를 수 있는 계단과 담장의 일부를 제거해 문을 만들어주었다. 겨..
직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떡볶이집이 들어온다는 소식은 나를 고무시켰다. 이는 마카롱이나 도넛보다는 붕어빵, 호떡, 식혜를 사랑하는 선거철 정치인 입맛을 가진 내게 그야말로 연봉 인상에 버금가는 기쁜 소식이었다. 이런 소식을 직장 동료에게 나누지 않는다면 정말 협동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는 소릴 들어 마땅하다. 다급히 낭보를 전하자 동료는 역시나 감격하며 기뻐했다. 이와 함께 매일 같이 떡볶이집 앞을 지나다니며 이제나저제나 하고 영업 시작을 기다렸다. 그러나 입구 안쪽에는 개업 축하 화분도 여러 개 쌓였건만 도대체 영업은 언제부터 시작인지 도무지 기약이 없었다. 이렇게 간절히 떡볶이를 기다린 적이 있던가. 어느 날은 이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아직도 영업을 시작할 기미가 없자 울컥 화가 나 어둡게 닫힌 문을 ..
내게 남아있는 동기는 살인 동기뿐. 초-중-고 학교 생활을 거치며 여태껏 연을 이어가는 사람을 꼽자면 한 손으로도 충분하다. 그와 반대로 대학교 동기들과는 졸업 후에도 서로의 안부를 꽤 알고 지낸다. 특수한 진로를 선택할 만큼 비교적 비슷한 시야를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단지 대학생 때부터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인스타그램이 널리 쓰이게 된 덕분일 수도 있다. 그것 이상으로 공들여 주변 사람들 챙기기는 귀찮다. 따로 연락할 필요 없이 좋아요 누르기로 안부를 체크하는 정도가 좋다. 단체 채팅방은 답답하다. 메신저 답변은 겁난다. 꼭 연락을 해야 한다면 언제 어디서 만나자는 구체적인 약속을 잡을 때만 하고 싶다. 게다가 무례하게 구는 사람은 오랜 인연이라도 크게 화를 내고 연락처를 지워버린 탓에 점점 주변이..
미대 입시생 시절엔 다들 한 번씩 기이한 행동을 하곤 했다. 미술대학의 좁은 문틈을 비집고 들어가기 위한 입시의 압박에 돌아버린 것인지, 미술학원에서 30분 간의 쉬는 시간 동안 화장실에 다녀온 다음 끼니를 해결하고 간식까지 구해와야 하는 미션을 매일같이 수행하는 비인간적인 스케줄에 지쳐 돌아버린 것인지 혹은 한국의 수험생이라면 문/이과를 차치하고 누구나 응당 그래야 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나의 경우 수능과 실기의 부담이 끔찍하게 클 때 놀아야 그 재미가 배가 된다는 독창적인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동분서주 놀러 다니며 부모 속을 뒤집어 놓곤 했다. 돌이켜보면 별 것 아닌 일도 그 당시엔 더욱 짜릿하고 즐거웠으므로 그 가설은 나름의 근거를 획득한 셈이었다. 미술학원 시절의 친구 역시 평생 두 번 다시 ..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풋풋한 커플에게는 정확히 언제를 1일로 정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 외에도 중대한 사항이 또 남아있다. 바로 서로를 부르는 애칭을 합의하는 것이다. 여기서 합의라는 단어를 넣은 이유는, 언젠가 나를 느닷없이 공주라 부르던 상대로부터 급격히 애정이 떠나가는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잘 잤나요, 공주님- 에 대단한 악의는 없었지만 그가 머릿속으로 어느 먼 나라에서 왕자와 공주 놀이를 하고 있다는 상상을 하면 여기 이 현실에 발 붙이고 선 나와는 전혀 다른 상대를 만나고 있음이 틀림없으므로 더 이상 교류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말이 그렇게 소름 끼쳤던 이유는, 이전의 연애 상대가 그런 류의 단어로 불리는 것을 즐겼기 때문에 그는 다음 상대인 나 ..
받아 쓰지 않은 말은 주워 담지 않은 곡식 낱알. 부족한 여백에 미처 쓰지 못한 정보를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모래처럼 아쉬워했다. 내게 공부란 쓰는 것. 들깨 같은 글씨는 거대한 수료증의 미세한 조각들. 모아놓고 보면 무수한 그라데이션이지만 등지는 순간 재가 되어 희게 날아간다. PILOT사에서 1994년에 출시한 젤잉크펜 하이테크C(HI-TEC-C)는 청소년 시절 나의 토템*이었다. 연약하지만 우아한 파이프형 팁을 가진 이 펜은 바닥에 한 번이라도 떨어트리는 순간 생명이 끝나버리지만, 귀하게 다루기만 하면 여섯 번째 손가락처럼 나와 촘촘하게 연결되어 세밀한 움직임까지 구현할 수 있는 인체 공학적 기계와도 같았다. 잉크를 남김없이 쓴 검은색 0.3mm 펜만 모아도 작은 박스 하나를 채울 수 있을 정도..
재미있는 대화를 나눌 사람이 줄었다. 몰입의 성과를 빅파이만큼이라도 얻은 사람들은 자기 자랑 읊기에 바쁘고, 삶의 낙이 없는 사람들은 삿갓조개처럼 입을 다물었거든. 떠드는 사람들은 자기가 너무 잘났고 입 다문 사람들은 들어줄 여유가 없으니, 이것 참 팽팽한 줄다리기 같다고 해야 하나 느슨한 컨베이어 벨트 같다고 해야 하나. 떠드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만족할 만한 대화를 올해 몇 번이나 했던가. 대화가 재미있었다면 내가 너무 떠들었기 때문이고, 재미없었다면 나보다 상대가 더 떠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래서 월드컵이 재미있었나 보다. 입 닫고 멍하니 굴러가는 공만 보면 되니까. 메시가 잔디 위에서 공을 차고 뛰는 모습만 봐도 충분하니까. 예전의 대화들이 정말 재미있었나? 혈기 왕성했던 그때 흩뿌렸던 말들..
누가 할머니를 사랑했을까? 아들 다섯에 딸 둘이면 차고 넘치는 장사였다. 그들도 할머니만큼은 아니지만 저마다 충분한 자식을 두었다. 제일 적은 수 둘로 자식들을 계산해도 며느리, 사위까지 더하면 최소 스물여덟 명의 자손을 거느린 셈이다. 그런데 그 많은 피붙이 중 누가 우리 할머니를 사랑했을까? 최초로 인식한 불결은 무엇이었던가. 오물 가득한 기억을 거슬러 오르며 끄집어낸 후보 중 하나는 바로 할머니 집에서였다. 기억 속 할머니 집에는 정원이 있었다. 정원에는 돌로 된 징검다리가 있었다. 뭔가 가득 찬 장독대 여럿도 담벼락을 따라 들쭉날쭉 모여있었다. 집 안에는 2층으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이 있었다. 나는 거대한 악어 인형 위에 앉아 계단 맨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썰매를 타며 내려오곤 했다. 푹신한 악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