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0327 월 / 성북구 핀란드로23 / 긴개 본문

2021-2023 긴개

0327 월 / 성북구 핀란드로23 / 긴개

긴개 2023. 3. 28. 01:17




 

 

 간절히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적이 없다고 말하면 대부분 놀란 표정을 짓는다. 물론 몇 번 가볍게 말한 적은 있다. 언젠가 대만에 가보면 재밌겠다-라거나, 일본에서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보고 싶다-하고. 그렇게 말한 뒤에 대만의 여행 후기나 일본의 가볼 만한 동네를 검색해보지는 않는다. 한때는 핀란드 작가 아르토 파실린나의 소설을 읽고 핀란드에 가보고 싶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잠시 떠올린 다음 여행이 실현되도록 행동에 옮기지는 않는 것이다. 이는 여행에서 크게 기대하는 바가 없기도 하거니와 아직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여행을 준비하는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에서 수많은 돌발상황을 맞닥뜨리고 해결하느라 진이 빠지는 탓도 있다. 또한 십 년이 넘도록 혼자서 네발짐승들을 키우고 있다. 이들에게 내가 며칠 동안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상황을 납득시키기란 쉽지 않다. 같이 있어도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이 식구들에게 충분히 논의하지 않은 일로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다. 

 

 그 대신 이사라면 지겹도록 다녔다. 성인이 된 뒤 홀로 이사한 것만 해도 구로구에서 세 번, 마포구에서 두 번, 도봉구에서 한 번, 충북에서 두 번, 용산구에서 한 번, 성북구로 한 번, 도합 열 번의 이사를 다닌 셈이다. 생활에 필요한, 혹은 마음의 안정에 필요한 모든 잡다한 물건들을 포장하고 청소를 하고 다시 짐을 푼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주변의 거리를 감상하고 마음에 드는 카페를 찾는 것도 능숙하다. 매번 새로운 동네에서 짧게 살다 간다. 같은 동네라도 집을 조금 옮기면 발길 닿는 길이 전부 달라진다. 지금까지 가본 여행을 떠올려보면 내겐 여행이 이사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해가 뜨는 방향과 이웃, 마을버스가 바뀌고 새로운 소리 풍경이 있는 곳을 탐험하고 적응한다. 장기간의 여행과 잦은 이사가 갖는 공통점이다.

 

 삶은 그 바탕이 되는 공간에 따라 무궁무진한 변주를 갖는다. 사람들은 여권에 도장을 찍고 낯선 나라에 가서 자신이 가질 수도 있는 또 다른 삶을 체험해 본다. 더 나아가서는 월 단위로 집을 빌려 장기간 거주해보기도 한다.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쇼핑과 레저 같은 단순한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 살았더라면-, 혹은 이제라도 여기에서 살아본다면-과 같은 새로운 삶을 상상하는 것이 여행의 매 순간을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 돌이켜보면 나는 잦은 이사 덕분에 새로운 지역에서의 새로운 삶이 가질 또 다른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적었다. 이 발견은 나를 조금 슬프게 했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확인해보고 싶다는 순수한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이 갖고 있는 반짝이는 눈빛이 내게는 오래전 사그라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