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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0320 월 / 옆 방의 외국인 / 긴개 본문
희로애락의 일주일을 보냈다. 오랜만에 애인에게 크게 상심했다. 이후 일주일 간 끈질기게 대화를 나누었다. 매일 새로운 변주곡을 발표하는 작곡가처럼 우리는 같은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재차 살폈다. 그 사이 뒷산에선 올벚나무가 발 빠르게 흰 꽃을 피워냈고 잿빛 땅 위로는 초록 풀이 돋았다. 인류의 고민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산이 싱그럽게 몸을 풀었다.
우리는 이제 막 데뷔 앨범을 발표한 밴드 멤버들 같았다. 평행세계 중 가장 오합지졸인 셜록과 왓슨 같기도 했다. 또한 그는 옆 방에 사는 외국인 같기도 하고. 어딘가 다른 기억이 업로드된 그의 복제품 같기도 했다. 미래에 쌓여있던, 함께 내릴 결정들이 순식간에 신기루가 되던 그때, 나는 뻐근한 뒷목을 붙잡고 무게중심을 재빨리 내 쪽으로 옮겼다. 나는 이 사람이 좋다. 남을 세심히 배려하고 정직한 성품을 지녔지. 하지만 더 소중한 것은 나다. 지금부터 이 배의 항로를 수정한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목적지에 닿도록 키를 바꿔 잡는다. 콧김을 뿜으며 빠른 결단을 내리자 애인이 내 옷깃을 부여잡았다. 여전히 내가 좋다고 말했다. 당연하지. 나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나려면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하니까. 어쨌든 당신 안목은 여전히 훌륭하구먼. 애인은 커다란 눈을 촉촉하게 글썽였고 우리는 결국 결정을 보류한 뒤 일주일 간의 대화를 이어갔다.
엄밀히 말하면 다툰 것도 아니었다. 애인은 도망가려 했고, 나는 더 이상 잡지 않기로 했을 뿐이었다. 수년 전, 만남을 시작할 때 나는 미래에 대해 물었다. 그가 기대하는 구체적인 미래가 궁금했다. 따로 또 함께 맞춰나갈 수 있는 미래를 구분하고 싶었다.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기 위해 상대가 어떤 기준을 갖고 삶을 대하는지 알고 싶은 마음은 당연하잖아. 나는 우리가 둘만의 즐거움을 탐험하고 동시에 서로의 등 뒤를 지켜줄 수 있는 든든한 팀이 되길 바랍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가족을 이루는 법적인 제도를 선호합니까? 혹은 보다 자유로운 상태를 선호합니까? 어떤 형태의 미래를 기대합니까? 그러나 그는 당황했다. 이제껏 그런 질문에 답해본 경험이 없었다. 따라서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듣기 좋은 말을 술술 지어내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눈을 빛내던 내게 만족할만한 답을 주진 못했다. 어쩌면 뒷걸음질 쳤다는 표현도 어울릴 것이다. 아차, 내가 성급했다. 좀 더 관계를 쌓아 올린 뒤에 다시 물어도 된다. 모두가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 모두는 자기 방식대로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게다가 내 질문은 단박에 답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생각의 근거를 충분히 찾을 수 있도록 기다려보자.
그는 알수록 좋은 사람이었다. 다양한 상황에 함께 놓이며 서로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때마다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또다시 질문해버리기도 했다. 당신은 어떤 미래가 오길 바랍니까? 물론 그가 답을 찾기엔 여전히 요원해 보였다. 이제는 우리가 운동장 백 바퀴를 이인삼각으로 돌 수 있을 정도로 긴밀해진 것 같은데도. 그러다 일주일 전, 또다시 이전과 달라진 바 없는 대답을 듣고 말았다. 어쩌면 내가 틀리고 그가 맞을 수도 있다. 미래 계획이라는 것은 방학 시간표처럼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홀로 온전한 삶을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을 하라고! 그 자유의사를 언어로 표현해 달라고! 당신의 의사를 존중하려면 먼저 그 의사를 정확히 표현해줘야 할 거 아녜요!
그 후 일주일 간, 우리는 그의 의사에 따라 여전히 함께이고 싶다는 결론을 전제로 한 뒤 ‘미래를 고민하는 것이 왜 두려운가’에 대한 이유를 탐색했다. 그는 답변을 잘하고 싶으나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 역시 괴롭다고 말했다. 도대체 어느 단계에서 그 생각이 길을 잃게 되는지 고민한 끝에, 무릎을 탁 칠 만한 간단한 가설을 찾아냈다. 이른바 감정을 근거로 선택을 내리는 ‘감정형 나’와 현실적 조건을 근거로 선택을 내리는 ‘조건형 너’ 가설. 우선 나의 경우, 그 순간의 감정에 따라 큰 결정을 할 때가 많다. 즐거움을 느낀 일은 반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괴로웠던 일은 피하려고 한다. 따라서 취향과 기호에 따라 전공과 직업, 주거 환경 등을 조정한다. 감정 반응의 역치가 낮기 때문에 작은 일에도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동시에 현재 어떤 감정 상태인지 스스로 잘 파악한다. 애인과 함께 지낼 때 안전하다고 느끼거나 행복한 순간이 많았기 때문에 그 경험을 토대로 더 오래 함께일 수 있도록 고민한다.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 쉴 새 없이 시선을 돌리는 탓에 남들 눈에 변덕스럽게 비칠 수 있다는 점이 단점이리라. 또한 직관적이고 단순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반대로 애인은 감정 반응의 역치가 비교적 높다. 덕분에 나와 반대로 차분하고 침착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때문에 스스로의 감정이 어떠한지 알아차리는 것이 늦다. 선택의 근거로써 현 상황에서 실현 가능한 조건들을 고려한다. 성적에 맞춰 전공을 결정하거나 심각한 문제가 없으면 현재의 직업이나 주거 상황 등을 유지하는 편을 선호한다. 농경 사회였다면 이러한 성실함과 인내가 보다 높은 결실을 이루었을 것이다. 혹은 삼십 년 전만 해도 큰 문제없이 자신의 위치에서 탄탄대로를 달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매년 가파르게 구조가 복잡해지는 현대 사회가 이러한 성격에도 약점이 있다는 것을 새롭게 드러냈다. 더 이상 부모 세대처럼 평생직장에 근무하며 안정적으로 수입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부모의 지원을 받지 못한 청년 세대가 대도시에 안정적인 주거 환경을 조성하는 것 또한 영영 어려워지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출을 받아 전세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으로 여겨졌으나 변동 금리가 큰 폭으로 인상되고 대량의 전세 사기 사건이 드러나며 이 또한 어려운 결정이 되었다. 단순 업무의 고용 안정성은 갈수록 낮아지고, 고등 업무마저 인공지능이 대체할 시기가 몇 년 내로 도래한다. 현재의 소득을 성실히 저축하는 것만으로는 걱정 없는 노년을 기대할 수 없다. 미래가 시시각각 불투명해지고, 부모 세대의 가르침이 단기간에 유명무실해지자 애인과 같이 자기 자신의 취향이나 의지보다 사회적, 현실적 조건을 토대로 결정을 내리던 성실한 사람에게는 쓸만한 데이터가 급격히 줄어들고 만다. 무엇을 근거로 미래를 대비해야 할 것인지 점점 알 수 없게 된다. 상대가 좋다는 단순한 이유로 큰 결정을 내리려는 나를 성급하게 여기면서도 반박하기 어렵다. 그는 보다 합리적인 선택의 근거를 찾다가 그만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감정을 근거로 선택을 내리는 인간에 대한 멸시는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이후 심해져 왔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저 사회학자들의 여러 발상 중 하나일 뿐이었는데도. 오히려 진화심리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감정 상태를 보다 민감하게 파악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초의 인류는 더 단순한 감정을 느꼈다. 두려움을 느끼면 도망가고,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은 반복했다. 감정은 상황 판단의 제1 근거로 인간의 수명을 유지하고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쓰여왔다. 두려움을 덜 느끼는 개체는 위험한 상황에서 어리석은 판단으로 사망해 유전자를 남기는 데 실패하고, 두려운 감정을 빠르게 파악하고 도망친 개체는 유전자를 남길 확률이 더 높다.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행동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거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는 데에 이바지했다. 섹스, 육아, 사회적 교류, 더 맛있는 음식을 섭취하는 것, 더 안전한 곳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것 등.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다. 약 6백만 년 전 침팬지와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분화한 인류가 오랜 기간 선택의 근거로써 애용해 온 감정의 요긴함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미래는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고작 1초 뒤도 그렇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보다 스스로의 기쁨과 행복을 제1 원칙으로 행동하는 사람의 미래가 행복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은 명백해 보인다. 따라서 애인이 앞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든 간에 자신의 행복을 주요한 근거로 삼을 것을 권하는 바입니다. 나는 그럴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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