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0403 월 / 오늘 뒤 어제 / 긴개 본문

2021-2023 긴개

0403 월 / 오늘 뒤 어제 / 긴개

긴개 2023. 4. 4. 01:25

 

 

 

 

 지금을 미루고 있다. 지금은 단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준비하는 기간일 뿐이라고 되뇐다. 정확히 뭘 준비한다는 건지는 몰라도, 네 머릿속에 있는 그 대단한 미래를 위해 지금은 참아 견뎌내야 해. 하기 싫은 일을 처리하고 소중한 하루하루를 월급으로 교환해야지. 집세 내고 장보고 적금 넣고 공과금 내고 커피 마시고 나면 얼마 남지도 않는 돈이지만 다들 그렇게 살잖아. 징징댈 일이 아니야. 이렇게 말하고 나니 이제 정말 어른이 다 되었다는 걸 느낀다. 어른의 고민을 짊어졌구나. 얼레벌레 살아도 스스로를 책임지고 있다. 닥친 일에서 도망치기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어. 멋져. 대단해. 

 

 동시에 분하기도 하다. 결국 이런 어른이 되었네. 세상의 재미있는 일은 다 벌일 것처럼 으스댔잖아. 톱스타라도 매일매일을 화려하게만 사는 건 아니지. 누구나 뛰어오르기 위해 도움닫기를 하니까. 그런데 과연 오늘의 도움닫기로 그곳에 뛰어오를 수 있기는 한 건지,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네. 휘적휘적 걷다가도 이내 어깨가 축 처져버리는 나날을 몇 달째 보내고 있다. 혹시나 몇 년 뒤의 나는 스스로에게 크게 낙담한 뒤 마지못해 하루를 견뎌내는 그저 그런 투덜이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때 스스로를 믿고 결단을 내렸더라면 이런 꼴은 되지 않았을 텐데-하고 후회해 버릴지도 모른다. 과거의 나를 탓하는 멍청이는 되고 싶지 않아. 변함없이 살아갈 경우 가장 개연성 높은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구체적으로 그려봐야해. 미래를 바꾸고 싶다면. 내가 이런 재미없는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어딘가 심오하고 획기적인 고민이었다면 좋았을걸. 폼나게 앉아서 눈썹을 찌푸리고 시가나 피우면서 먼 산등성이를 바라보고 한숨을 한 번 내쉬면서 할 법한 고민을. 그런데 생각해 보니 지금도 그런 꼴로 고민할 수 있을 것 같아. 포즈는 취해볼 수 있잖아 포즈는.

 

 지금을 우선 넘기고 보자는 태도로는 내일도 바뀔 리 없다. 임시로 얻은 삶을 살듯 흘러가다 꿈꾸던 삶에 안착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민은 어제나 그제나 다름이 없는데 매일 걷던 산길은 어느새 연한 새 잎으로 촉촉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터덜터덜 걷다 우수수 바닥에 떨어지던 꽃잎 사이로 연분홍 한 점이 다시 허공으로 팔랑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작은 날개를 팔락이더니 멀리 날아가버렸다. 내 고민이 너무 시시하고 집요해서 봄이 아깝다. 아니, 삶이 아깝다. 온전하게 살아내도 아까울 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