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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모기 물린 자국은 희미해져 가고 산책 후엔 옷깃에 나뭇잎이 달리는 계절이다. 어느새 매미들이 입을 다물었다. 뒷산을 타고 노는 새들 중 몇몇은 먼 나라로 떠날 채비를 할 것이다. 트렌치코트 입기엔 낮이 더워 일주일은 더 기다려야 하는 이때, 니트 조끼를 입기로 한다. 뒤죽박죽 날씨에 걸맞은 현명한 선택이리라. 그렇게 흰색 반팔 티셔츠 위에 남색 조끼를 걸치고 집 밖을 나설 때는 당당했으나 한낮의 햇빛에 등허리가 금세 축축해졌다. 가고 싶었던 서점에 업무 상 방문하게 된 덕분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영업하지 않는 날을 대관한 터라 일반 손님도 없었다. 넓고 깨끗하고 조용한 서점 안에서 영원히 헤매고 싶었다. 참지 못하고 책을 사고 말았다. 갖고 싶은 책을 만나면 브레이크를 밟기 힘들다. 읽지 않은 책..
밤 아홉 시 즈음 깨닫는다. 출출하다는 것을, 그리고 뭔갈 먹기엔 늦은 시간이라는 것도. 해가 진 뒤에 간절해지는 음식은 대부분 기름지고 달고 짠 것들이다. 먹고 나면 금세 더부룩해진다. 자연스럽게 냉장고에 맥주가 남아있던가 기억을 더듬어보게 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그만 두자. 여기서 굴복한다면 정해진 미래는 하나뿐이다. 기름진 음식을 먹고 맥주로 식도와 위를 식힌 뒤 빵빵해진 배를 눕혀 힘들게 잠들었다가 피곤이 배가 된 채 아침에 깨어나는 것, 그리고 어젯밤을 후회하는 것. 미래를 엿본 현명한 자는 요거트 하나, 이것만으로 굶주린 충동을 얼마든지 굴복시킬 수 있다. 확고했던 다짐은 밥풀로 붙여둔 메모지처럼 시간이 지나자 힘없이 나풀거려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요거트를 위장으로 한 숟갈씩 내려보냈더니 ..
쫓기듯 이사한 집엔 빛이 들지 않았다. 창문은 눈보다 높게 달려 있었다. 종종 그 앞으로 지나다니는 주인집 아줌마의 쓰레빠가 보였다. 무릎은 커녕 종아리도 간신히 보이는 좁은 창문이었다. 가끔 고양이들이 창틀에 올라가 어딘가를 골똘히 보았다. 창문이 너무 높게 달린 탓에 거길 뛰어 오르고 뛰어 내릴 때 주변의 많은 것을 넘어트렸다. 비 오는 날엔 젖은 먼지가 튀고 밤엔 벌레가 들어오는 골치 아픈 창문이었다. 그래도 그 비좁은 구멍으로 들어올 강도는 없을 것 같았다. 동네는 산비탈에 있었다. 집을 나오면 무조건 가파른 내리막이나 오르막을 걸어야 했다. 조금만 걸어도 허벅지가 아프고 숨이 찼다. 도로엔 사람을 위한 여백이 없었다. 마을버스 백미러가 귓가를 스쳐도 앞만 보고 걸었다. 마을버스, 택배 트럭, 택..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고 해서 미술대학에 갈 필요는 없다. 미술대학을 졸업해놓고 미술학원에서 배운 대로 그리는 나를 보니 알겠다. 학원에서 배운 입시 미술 기본기는 대학에서 배운 수많은 이론보다 깊은 곳에 들러붙은 뒤 흡연자 폐 속의 타르처럼 떨어지질 않는다. 어젯밤 간만에 파레트를 꺼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입시 미술학원에 등록하며 샀던 이 낡은 수채 파레트는 그때의 붓 세트와 함께 아직까지도 종종 책상 위에 오른다. 며칠 전 본 오리를 그리고 싶었다. 맑은 날 오리가 노니는 물가는 반짝이고 시원했다. 당시의 사진을 참고해 스케치를 하고 수채 물감을 풀어 색을 칠했다. 한참 그려놓고 보니 알겠다. 이건 머리가 아닌 손의 기억으로 그린 그림이다. 수고를 덜고 그려 발전이 없는 그림. 길가에 세워놓은 트..
커튼을 걷고 오늘의 하늘을 처음 본 순간 생각했다. 이런 날 바깥에 안 나가는 사람은 바보라고. 서둘러 아침 식사를 하고 간단히 씻은 뒤 집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집집마다 묵은 이불을 꺼내 빨고 바깥에 말리도록 마을방송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하늘이었다. 햇살 아래를 걸으면 따스하고 그늘 속을 걸으면 상쾌한 지금은 26°C. 주민 센터 앞 습도계는 34%를 알린다. 일 년 중 가장 완벽한 순간의 정확한 온도와 습도의 수치를 알아낸 것이 못내 뿌듯하다. 갓 만든 유리처럼 투명한 하늘 아래에서라면 어디든 걸어서 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한동안 무섭게 내린 비에도 숲은 선퇴*를 구석구석에 남겨놓았다. 나뭇잎 사이를 헤치고 햇살이 드디어 말간 땅에 닿는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앓고 난 뒤 오랜만에 ..
실내에서 볼일 보는 것을 수치스러워 하는 개들 중 하나가 우리 집에 산다. 이 개는 자신이 집안일을 돕기는 커녕 배설물 처리까지 요구하기가 염치 없는 일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는 집 안에서 절대 볼일을 보지 않는다. 대신 드넓은 하늘 아래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배변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덕분에 우리가 함께 살게 된 이래로 하루 세 번의 산책은 눈과 비도 막지 못하는 중대한 일과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산책이라는 게 보호자 입장에선 썩 재미가 없다. 매일 같은 코스의 산책이 즐거운 건 개 뿐이다. 함께 걸을 때의 리듬은 불연속적이고 예상하기 어려운 전개를 보인다. 개가 몇 걸음 걷다 말고 자꾸만 멈춰서서 코를 킁킁거리기 때문이다. 어찌나 신중해보이는지 이제 그만 가던 길 가자고 채..
ATV(All-Terrain Vehicle), 이른바 사륜 오토바이 아래에 깔리는 건 상상만큼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저 얼얼하여 주위를 분간하기 어렵고, 어딘가 욱신거리기는 했으나 그것이 등인지 엉덩이인지 알 수 없었다. 양 손바닥과 얼굴에 모래가 폭탄 파편처럼 박혀있었다. 까슬하고 텁텁한 모래는 혀에도 덕지덕지 붙어있었는데 입을 다물면 삼킬 것 같고, 누운 채로 침을 뱉었다간 얼굴에 그대로 묻을 것 같았다. 입을 꼭 다물지도 벌리지도 못한 채 버둥거리려니 어디선가 아빠가 쏜살같이 날아와 내 몸을 덮고 있던 거대한 사륜 오토바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마치 내가 그 시간에 그 위치에서 전복될 것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빠른 처치였다. 이후 어떻게 빨리 달려올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느닷없이..
우리 개는 길에서 함부로 눕지 않는다. 집이라면 어디서나 털썩 웅크려 따뜻한 몸을 돌돌 말고 있지만 밖에서는 어림도 없다. 오래 걸어 피곤할 때는 잠깐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다소곳이 앉지만 거기까지다. 집에서처럼 무방비로 누워 힘을 빼고 있는 모습은 도통 보기 쉽지 않다. 이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개는 집에서도 부드러운 천이 깔린 조용한 침실에 가서야 천천히 네 다리를 곧게 편다. 낯선 곳에서 쉽게 움찔움찔 놀라는 이 개 때문에 커피를 다 마시기 전에 카페를 나오게 될 수도 있다. 옆 테이블의 개는 길에서 태어나고 자란 듯 아무 바닥에나 넓게 누워 눈을 감고 있다. 반면 우리 개는 묵직한 컵이 테이블 위에 닿는 소리, 사람들이 몸을 움직이며 의자를 끄는 소리, 문이 갑자기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 절대 익숙해..
방학을 맞은 소윤이가 서울에 놀러 오겠다고 한다. 너 혼자? 너 혼자 고속버스 표를 예매하고 버스를 타서 서울에 와가지고 지하철로 갈아탈 수 있어? 소윤이는 코웃음을 친다. 이제 소윤이는 애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자식이 글쎄 18살이 된 것이다. 아니 너 엊그제만 해도 중학교 1학년이었잖아. 중1이 고2가 되기까지 억겁의 시간이 흘러야 했을 텐데, 그걸 겪어냈단 말이야? 덜컥 걱정이 된다. 청소년 소윤이가 살아낸 4년은 내가 살아낸 4년보다 몇 배는 촘촘하고 치열했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초당 24 프레임에 그쳤던 어느 날이 소윤이에게는 60 프레임 이상의 선명한 순간이었을지도, 그리고 그런 날들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서로가 동일한 시기를 살고도 다른 밀도의 경험을 ..
당시만 해도 전자제품을, 그것도 고가의 것을 사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용던*에 가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 얼굴도, 사는 곳도 모르는 사람에게 인터넷으로 비싼 물건을 주문한 뒤 그것이 멀쩡한 상태로 배송되길 기대하는 건 그야말로 어디 가서 사기당하기 딱 좋게 순진한 바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 상식적인 구매자라면 내 발로 찾아가서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에 들고 와야 했다. 적어도 우리 아빠 생각엔 그랬다. 아빠랑 단둘이 집 아닌 곳으로 간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런 일이 굉장히 드물었기 때문에 조수석에 탄 나는 어색해하면서도 조금 들떠 있었다. 우리는 용산전자상가에 노트북을 사러 가고 있었다. 아빠는 항상 동생에게는 최신 핸드폰을 사주고 나는 공짜폰을 쓰게 했다. 남자는 만년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