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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5 긴개 (6)
성북동 글방 희영수
인정한다. 도보 순례가 좋았다는 것을. 평소 수호하던 가치관-깨달음에 고행이 필수라는 생각은 오만이다-을 결국 부정하게 되는구나. 고통을 요리조리 피하려 최선을 다했던 이전의 나를 머쓱해하며. 싫은 점보다 좋은 점이 더 많았다는 걸 인정하기가 왜 그리 싫었는지. 일주일 간 100km 이상 걷는 동안에는 몰랐다. 아니 알 수가 없었다. 매 순간 내딛는 발걸음에 몰두하고, 날씨에 따른 신체의 온도 변화에 대응하느라 정신없었다. 그러나 그토록 기다리던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발견했다. 다리와 배에 근육이 꽤 붙었다는 것을. 오르막길을 오를 때 누군가 뒤에서 엉덩이를 밀어주는 듯 튼튼해진 몸을. 이 순례가 끝나기만 하면 하루 종일 집에서 꼼짝 않을 거라던 다짐도 무색하게, 짐을 풀고 세탁기를 돌리자마자 밖으로 ..
몇 달간 글방에 '윤석열 파면' 손팻말들을 붙여두었다. 처음엔 유리 밖에다 붙였는데 누군가 자꾸 떼버렸다. 종이를 뜯었으면 분리수거나 할 것이지 길에다 냅다 버려놓았지 뭔가. 길 가다 말고 슬그머니 멈춰 서서 남의 가게에 붙은 종이를 손톱으로 긁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니 좀 징그러웠다. 스토리에 찢어진 손팻말을 찍어 올렸더니 한 글벗이 새것으로 여러 장 구해주었다. 거기다 영리하게도 하나는 밖에, 하나는 안에 붙였다. 며칠 뒤 찾아온 잡범은 결국 한 장만 조금 뜯다 돌아간 듯했다. 자꾸 찾아오는 이의 표정이 궁금해 CCTV를 설치했지만 며칠 보다 말았다. 녹화 파일 보고 있을 시간에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내가 글방에 없을 때만 찾아와서 한다는 짓이 고작 종이 뜯기라면 상대하기도 너절하다. 할 말이 있으면..
죽기 전에 최고의 팬티를 찾을 수 있을까. 좋은 팬티를 찾는 건 좋은 애인을 구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두어 달째 여러 속옷 브랜드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한 달 뒤 수십 명과 도보 순례를 갈 예정인데 속옷 서랍엔 해진 팬티만 그득했기 때문이다. 순례 일수만큼의 팬티를 챙기는 대신 가방 무게를 줄일 수 있게 몇 장의 팬티만 매일밤 손빨래해 돌려 입을 계획이었다. 잠들기 전 머리맡에 널어놓은 팬티가 새것은 아니더라도 멀끔해야 하잖아. 그런데 순례를 앞두고 건조대에서 팬티를 개다 보니 지금까지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부분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구멍, 터진 고무줄, 뜯어진 심리스 접착라인 등 자세히 볼수록 가관이었다. 어쩐지 너덜너덜한 팬티는 남자보다 여자한테 보여주기가 더 싫다. 같은 방에 묵을 사람들에게..
의외로, 나도 미래를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낮에는 벤치에서 졸다가 저녁엔 화장실 한 칸에서 잠이 드는 노인의 팔뚝에 익숙한 문신이 새겨져 있는 장면 같은 걸 떠올리면 잠이 번쩍 달아난다. 노년의 빈곤이 두렵다. 망가지는 몸만으로도 괴로울 텐데, 그 몸이기에 가속될 빈곤은 더욱 견디기 힘들 것이다. 이십 대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단지 젊다는 이유로, 멍청하고 무례하던 나를 써준 고용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혹은 젊다는 이유로 밥이나 술을 턱턱 사는 인생 선배들도 있었다. 젊음은 보기에도 좋고, 어울리기에도 좋다. 심지어 체취도 좋다. 수렵 사회의 우두머리는 청년이고, 농촌 사회의 우두머리는 노인이었다. 사냥은 힘으로 하고, 농사는 지혜로 지었다. 사회 구조의 변화로 노인의 지혜가 쓸모를 잃은 ..
죽지 말지. 세상에 널리 이로운 사람이었는데. 그럼 해로운 사람은 죽으란 말인가요?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근데 얼마나 해로운 사람인데? 죽지 말지. 잘생긴 사람이었는데. 그럼 못생긴 사람은 당장 죽으란 말인가요? 말이 그렇게 되나. 죽지 말지. 현명한 사람이었는데. 그럼 멍청한 사람은 죽어도 된단 말인가요? 얼마나 멍청한 사람? 죽을 사람은 그래도 되는 사람. 나 곧 죽네. 영원히 살아남았어야 할 너 대신 해롭고 멍청하고 못생긴 내가 마땅히. 신전에 나 바쳐 네 빛이 영원의 시간을 달린대. 네가 우주 끝까지 뻗어가는 바람에 지금 여기에 없게 되었대. 널 섞은 흙을 유리병에 담았는데 시계가 깨트렸어. 사이가 안 좋았던 모양이지. 너와 시곗바늘 사이에 모종의 수군거림이 있었는데 내가 몰랐던 거지. 다시 ..
아침마다 걷는 좁은 골목에 지저분한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 골룸 시체라도 질질 끌고 간 것 같았다. 짙은 누런색의 자국이 5미터는 넘게 이어졌다. 자세히 보니 점이 가득했다. 점이라기보단 덩어리, 덩어리라기보단 건더기 같은 것이었다. 짜잔. 놀랍게도 전부 구더기였다. 환경 보호를 위한 식용벌레 아이디어에 대찬성 의견을 밝혀왔는데, 잠시 철회하고 싶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냐던데, 두 번 다시 그 골목은 못 걸을 것 같았다(하지만 훌륭한 지름길이라 결국 저녁에도 지나가고 말았다). 구더기는 손가락 한 마디보다 긴 것도 있었다. 내 손이 꽤 큰 편인데도 말이다. 말 그대로 바닥에 구더기가 득실득실했다. (1993)의 악당 우기부기가 칼로 찔린 뒤 기어가기라도 한 모양이었지만 범인은 다른데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