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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방문은 처음이었다. 이름도 주변 지리도 낯설다. 아무리 전시 방문 빈도가 낮은 편이라 해도 명색이 미술학도였는데 이렇게 미술관이 낯설어서야 되겠나. 쓸데없이 자존심이 상했다. 검색해 보니 개관일이 올해 4월 4일이라니. 그럼 그렇지. 미술관에 잘 가진 않지만 내가 모르는 미술관이 많아선 안 되지. 전혀 낯설지 않은 척, 당당하고 느린 걸음걸이로 야트막하게 옆으로 넓게 펼쳐진 새 건물에 입성했다. 비록 어슐러 K. 르 귄이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에서 ‘예술은 해설이 아니다. 예술가는 예술을 할 뿐 설명하지 않는다. 내 생각은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작품을 주목해야 할 이유’나 작품을 ‘감상하는 법’을 쓴 작가의 설명이 곁들여진 현대 미술이 불만스럽다.’고 말했지만, 나는 서..
모처럼 긴 휴일을 맞은 정민 씨가 평창동의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에서 열리는 전시 관람을 제안하기에 흔쾌히 그러자 했다. 여기서 ‘흔쾌히’란, 평상시의 내가 도통 여유 시간을 전시 관람에 할애하는 타입의 사람이 아님을 두드러지게 하려는 말이다. 공과대학을 졸업한 정민 씨가 먼저 전시 관람을 제안하고 미술대학을 졸업한 내가 수동적으로 응하는 데에는 혹시 ‘관람’에 대한 다른 잣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야 생각해 본다. 전시를 ‘본다’는 건 뭘까. 전시장에 도착해 바닥에 그려진 화살표를 따라 걸으며 벽면에 붙은 뭔가를 흘끔흘끔 보고, 때로는 핸드폰을 꺼내 찍다가 어느새 화살표를 따라 전시장 밖으로 나오는 것이 관람의 처음과 끝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더 넓게 보자면 취향에 맞는 전시를 찾아 검색하고, 정..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긴 하품을 했다. 오후의 겨울 햇볕은 부엌까지 깊게 스며 공기를 부드럽게 데웠다. 코를 킁킁거리다 몸을 뒤척여 편한 자세를 찾았다. 이 부드러운 방석 위에선 어떻게 누워도 늘어지게 잘 수 있지만, 이런 잠투정이야말로 내 처지의 본분일 테니. 다시금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문이 닫힌 작은 방 안에선 흐느끼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내 쪽이 하품 뒤의 느긋한 눈물 한 방울을 문질러 닦는 동안, 저기선 좌절과 절망, 체념이 콸콸 흐른다. 하여간 드라마를 너무 본 탓이라니까. 넌 아직 내가 겪은 나날의 반에도 미치질 못했는데. 지금부터 이렇게 무너져 내리면 앞으론 어쩌려는 거야. 제 팔자 제가 꼰다던 엄마 말이 맞을지도 몰라. 저것도 제 복이다. 나는 눈을 감..
기후 위기 해결 방법 1; 선택적 무지를 뛰어넘는 허세 장착하기 『브레이킹 바운더리스』와 『우정의 언어 예술』 내 입에서 침이 아닌 기후 위기 이야기가 튀어나온 것이야말로 지구가 여섯 번째 대멸종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다. 공영방송이나 공공기관에서 밈 meme*을 차용하기 시작하면 그 밈의 수명은 끝난 것과 같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상대적으로 유행의 흐름에 둔감하다고 여겨지는 공공기관의 홍보 담당자들이 밈을 써먹을 때쯤이면 이미 밈은 파생에 파생을 거치며 자가복제할 동력이 바닥나고 그 의미도 희미해졌을 거란 뜻이리라. 게다가 공공기관에서 사용하는 밈을 따라 하고 싶은 마케터는 없을 테니, 거기에서 그것의 수명은 끝이 난다.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불려 다닌 밈은 폭발적인 탄생과 화려한 청년기를 거치다 돌..
나의 무능한 엄마에게. 엄마. 오늘은 나의 탄생일이다. 당신이 나의 탄생에 중대한 기여함을 감사한다. 인류세 동안 지구를 정복했던 생물인 동물계 포유강 영장목 사람종은 시간을 선형적으로 이해하여 시간이 물처럼 과거에서 현재, 미래 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인식했다. 그들은 마음에 든 특정적 사건이 발생하면 사건이 종료된 후라도 그것을 일정한 주기를 두고 반복하여 기념하는 풍습이 있었다. 흐르는 시간 위로 여러 번 퍼올릴만한 사건이라면 개체의 탄생일도 그중 하나이다. 탄생일을 기념하는 방법 중 하나로는 자신을 출산한 모체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도 있다. 감사하다는 것은 자신이 받은 일이나 말 등의 가치를 언어로 보답하는 인사이자 예의 표시이다. 그 풍습이 마음에 든다. 엄마 대단히 감사하다. 묻기를 희망한다. ..
우파국에서의 첫 일기는 2079년에 쓰였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내게는 그동안의 일기를 시간 순서대로 꺼내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것 말고는 달리 가질 수 있는 취미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발령 초반의 일기들에서는 당시의 생동하던 감정들- 혼란, 흥분, 걱정 -이 매 장마다 폭발하고 있다. 신체가 젊었던 만큼 마음도 팔팔했다. 그러다 오 년 정도가 흐른 뒤에는 우주 생활에 지쳐 차갑고 건조한 우울이 우세하게 종이를 점령한다. 계약 만료를 일 년 남짓 앞두었을 때는 또다시 발령 초반과 비슷하게 감정이 요동쳤다. 지구로의 복귀를 기대하며 혼란과 흥분, 희망이 매일의 나를 일깨웠다. 결국 복귀하지 못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는 젊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유일한 자산이었다. 서재의 동그란 창 밖으로는..
그는 언제인지도 모르게 길을 잃었다. 어디에 가려던 것인지 아닌 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제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거센 바람이 빗줄기 허리를 감아 휘몰아친다. 흘러내리는 빗물에 힘겹게 눈을 떠도 사방이 어두워 주위를 분간할 수 없다. 소란스러운 어둠에 귀가 먹먹해졌다. 어쩔 줄 몰라하는 와중에도 그의 마음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다. 내게 끝이 온다. 내게 곧, 끝이. 눈앞에 투명한 막이 생긴 듯 시야가 점점 흐려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비좁은 주머니에 온몸이 갇혀 버린다. 발 끝부터 머리끝까지 빠져나갈 수 없게 몸을 감싸버린 주머니 속에서 그는 무의미한 발버둥을 친다. 주머니는 부드럽고 단호하다. 두려움에 폐가 쪼그라든 그가 헐떡이며 팔다리를 마구 뻗는다. 점차 ..
서른세 번쯤 다시 태어났을 무렵의 일이다. 유예했던 불안이 마감 기한을 알리러 찾아왔다. 똑똑똑,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똑똑똑,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똑똑똑, 모르는 체하셔도 소용없습니다. 모르는 체하는 것으로 사라질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불안은 끈질기게 내 뒤를 지킨다. 어디든 가보세요. 어디든 따라갑니다. 당신이 두려워하던 그 일이 일어날 때까지, 일어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일어나도록 만들어드립니다. 불안은 떠올리는 만큼 힘을 얻는다. 점점 실제에 가까워진다. 피하고 싶던 일이 결국 벌어지게 만드는 것은 나에게 달렸다.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참지 못하고 눈을 마주쳐버린다면 불안이 내 손을 잡고 그 소용돌이 속으로 끌고 들어가리라. 나약함 때문에..
그래, 고양이는 죽었냐? 집을 나서며 만난 동네 할머니한테 인사를 했더니 돌아온 말이다. 어딘지 섬뜩한 이 말은 사실 비아냥대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오히려 걱정 어린 눈망울로 인사하는 할머니로부터 나왔다. 우리 집 첫째 고양이 호두가 간암으로 병원에 다니며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 뒤로 동네 할머니들은 나를 볼 때마다 고양이의 안부를 묻곤 했는데, 막상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은 대개 저런 투였다. 나는 그 말의 어감에 화들짝 놀라면서도, 그 말을 건네는 정감 어린 표정에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다른 누군가가 저런 말로 내 고양이 안부를 묻는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서로의 얼굴에 주먹을 메다꽂는 관계로 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들이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기에 싸우는 중인가 귀 기울여 들어..
바다에 뛰어드는 사람을 그렸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빚어낸 바다. 우리 모두의 고향. 우리 중 누군가는 그곳에 돌아가고 싶을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첨벙 바다로 뛰어든 사람을 그렸다. 바닷물고기의 점박이 무늬가 가득한 노란 사람이었다. 수면 위에서부터 아래로 뻗어가는 빛도 넣고 싶었다. 그 사이로 해초가 넘실거렸으면 좋겠다. 그런데 한참을 매달려 그렸건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초는 옥상 방수 페인트를 바른 듯한 초록색이다. 게다가 얇게 하늘거리는 대신 두꺼운 꼬챙이가 휘청휘청 휘어진 꼴이 되었다. 노란 인간은 시원하게 첨벙 뛰어드는 대신 물에 깜짝 놀라 버둥거리는 꼴이다. 어디서부터 이런 그림이 만들어졌을까. 이렇게 낯설고 답답한 그림을 내가 직접 그렸다. 여러모로 믿기지 않는 작품. 연습만이 살 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