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아홉 달째 발레를 배우고 있다.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거나 퇴사를 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다. 그동안 허벅지 앞 근육이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고 복근도 선명해졌다. 이제는 꼿꼿이 선 채 엄지 발가락으로 방의 전등 스위치를 켤 수도 있고 발 끝으로 고양이를 쓰다듬을 수도 있다.
영화 <킬빌>에서 주인공 베아트릭스는 수년 간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다음 쇠약해진 몸의 근육을 깨우기 위해 스트레칭을 하는데, 이때 맨 처음 시도하는 것이 바로 발가락 구부리기이다. 그녀는 몇 시간 동안 트럭 안에서 발가락 하나하나를 굽히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린다. 영화 볼 때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던 그 장면은 발레 첫 시간에 불현듯 다시 떠올랐다. 이제껏 살면서 발가락을 구부릴 일이 없었단 나의 발가락 근육은 혼수상태에서 막 깨어난 베아트릭스의 것처럼 쪼그라들어 제 몫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용을 써도 마치 공중부양이라도 시도한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발가락을 구부리지 못하는 발레리나는 팔이 묶인 마라토너와 비슷하다. 발 끝을 뾰족하게 뻗어 다리를 길어보이게 만드는 기본 자세 포인(point)부터 불가능했던 나인데, 지금은 발가락을 핀셋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 지나간 시간들의 증표로 내보일만한 것은 구부러진 발가락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다.
발레는 연습하는 내내 거울로 자신의 자세를 살핀다. 허리와 목은 꼿꼿한지, 발 끝과 무릎을 곧게 폈는지, 팔꿈치는 제대로 들고 있는지 신경 쓰며 음악에 맞춰 동작을 수행한다. 이때 옷이 예쁘면 더욱 자신감이 붙는 것은 당연하다. 또 헐렁한 옷을 입으면 몸이 만드는 선을 정확히 볼 수 없기 때문에 몸을 잘 드러내면서도 움직이기 편한 옷을 입어야 한다. 레깅스만 입었더니 어쩐지 민망해 스커트를 두르고, 겨드랑이 면도를 완벽하게 해야할 것 같아 민소매는 피하고, 어떤 레오타드는 몸통의 길이가 짧아 팔을 높이 들 수가 없었다. 한 번에 완벽한 운동복 세트를 장만하기란 가당치도 않은 희망이었다. 고작 일주일에 두 번 나가는 발레 수업을 위해 레오타드와 스커트, 스타킹, 레깅스, 탑 등을 자꾸 사 모으게 되는 것은 이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노라고 변명하고 싶다.
오늘은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려다 마음을 굳게 먹고 선생님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연습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내 모습을 남기고 싶었다. 이로써 구부러지는 발가락과 허벅지 근육, 각종 발레복 외에도 발레를 하고 있다는 증거를 또 하나 얻을 터였다. 그저 멀뚱 서 있는 채로 몇 장 찍을 생각이었다. 연습실에서 발레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싶어서. 그런데 선생님은 무려 세 종의 포즈를 주문하며 각 포즈 당 다섯 장 이상의 사진을 찍어주셨다. 연습 때와 마찬가지로 턱 끝부터 발 끝까지 세밀하게 조정하며 엄격한 촬영 감독의 역할을 수행한 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평소 실력은 중요하지 않아요. 사진을 찍을 땐 일단 포즈가 완벽해 보이면 그만이에요.”
정말 옳은 말이었다. 사진 속 나는 제법 꼿꼿해 보인다. 거북목과 구부정한 자세를 고치기 위해 선택한 운동이 효과를 본 듯 했다. 어깨부터 팔로 이어지는 선도 멋지다. 찍히는 민망함을 참지 못해 너무 환하게 웃어버려 바보 같지만, 볼수록 마음에 든다. 카카오톡 프로필도 이 사진으로 바꾸고, 인스타그램에도 잽싸게 올렸다. 연예인이 아니고서야 자기 사진을 제일 많이 들여다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리라.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나는 몇 번이고 그 사진을 다시 확인했다. 그동안 납부한 학원비가 이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남들 눈에는 시원찮을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보인다. 한껏 구부러진 발가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