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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인간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사회적 기술 중 가장 까다롭고 미묘한, 그러나 가장 위대하고 필요한 것이 바로 공감이다. 적확한 시각과 좌표에 쏘아 보낸 공감은 기후위기와 전 세계적 냉전으로 인한 멸망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된 인류를 구원할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추락하는 수송기에서 떨어뜨린 핵폭탄이 어쩌다 바닷물 위로 힘차게 뛰어오른 멸치의 세 번째 등뼈만 정확히 파괴하고 사라질 확률처럼, 그것은 도통 일어나기 힘들 것만 같다. 공감은 스스럼없이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그것을 정밀하게 다루는 사람은 드물다. 나라고 다를 바 없다. 우리 애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해서 성적이 안 나왔다는 엄마들 타령이 예부터 전해져 내려오듯, 나는 내가 하고자 하면 누구의 마음이라도 깊게 헤아리고 핀셋으로 콕 괴..
겪어본 적 없는 미래가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내 앞에 도착했을 때 느끼는 이 기시감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불완전한 기억들이 일시적으로 뒤섞여 마치 언젠가의 기분인 듯 위장한다. 나는 현재로부터 어긋난 병뚜껑이 되어 틈새로 물을 모두 흘려버린다. 모두가 침착하게 현재와 융화하고 있다. 정말 그럴까? 도무지 타인의 좌표는 추측하기 어렵다. 튼튼한 동아줄은 지금 이 순간에 찰싹 달라붙어있고, 속이 썩은 동아줄은 카우보이의 손 끝에서 날아 얼간이들을 쏙쏙 끌어낸다. 개척지와 개척지 사이의 황폐한 사막을 구르는 뼈다귀가 바로 내 유골이다. 아주 징그러운 사진을 보았다. 보통은 그런 일이 없다. ‘혐오주의’ 같은 경고가 달린 게시물은 절대 클릭하지 않는 편이거든. 그러나 이번엔 손가락으로 화면을 쓱쓱 쓸어내리다..
쓸 이야기가 없다. 몰아치는 일감을 겨우겨우 쳐내느라 온통 모니터 앞에 붙들려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목요일에는 새를 보러 서울숲에 가긴 했다. 소중한 캠코더 캠브릿지와 조류 도감, 쌍안경을 챙겨 뚝섬역에서 내렸다. 셔츠에 니트 조끼, 재킷 차림으로 새를 보러 간다기엔 꽤 멋을 부린 모양새였다. 그렇지만 새를 사랑한 남자 존 제임스 오듀본 역시 셔츠에 재킷 차림을 하고 있는 초상화를 남겼거든. 내 지론이지만 새 애호가들의 드레스 코드는 클래식해야 한다. 점잖고 근사한, 묵직한 멋을 풍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쌍안경을 들고 어딘가를 급히 살펴보는 모습이 수상해 보이고 만다. 멋 이전의 실용성의 문제로, 멀끔한 의복 차림은 쌍안경을 들고도 주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지 않는 부드러운 방법이 될 수 있다. 게다..
캠코더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양손에 핸드폰과 캠코더를 놓고 저울질해보니 보호케이스를 끼운 아이폰 XR이 더 무거운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한 손으로 쥐기도 편하다. 엄지로 녹화 버튼을 누르고 검지로 사진 촬영을 하거나 줌을 당길 수 있다. 손바닥으로 받치고 나머지 손가락으로 감아쥔다. 투박한 기본 스트랩 덕에 놓치지 않고 손에 걸 수 있다. LCD 패널을 다각도로 회전할 수 있어 낮은 각도로 찍을 때도 장면을 확인하기 편하다. 핸드폰으로 촬영할 때는 손가락이 고생 많았지. 이제 고생 끝, 촬영 시작이다. 출근길에 산을 넘다가 맞닥뜨린 새를 미처 찍지 못하고 날려버린 순간이 많았다. 처음 보는 새가 나타났을 때 쌍안경 초점을 맞추고 핸드폰 카메라를 갖다 대 촬영하는 어설픈 디지스코핑*을 하다 보면 새는 ..
흰 국화 한 다발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생기가 넘친다. 처음엔 봉오리였던 것들이 꽉 쥐고 있던 여러 겹의 잎을 서서히 늘어놓으며 오히려 더 만발하기도 했다. 국화는 일종의 선전물이었다. 거기에서 좋은 향기가 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태어난 꽃이라면 필히 진다. 그것은 모두가 합의하지 않아도 예정되었던 일이다. 그러나 누구도 동의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지고 말았다. 도대체 여기서 뭘 깨우치고 반성하고 미래를 도모해야 하는지 그냥 다 때려치우고 없던 일로 해버리면 나는 희대의 영웅이 될 것이다. 간절한 사람은 영웅이 될 수 없고, 얼떨결에 영웅을 떠맡은 사람들은 괴로워 잠을 설친다. 분향소엔 두 번 갔다. 그중 하나엔 기자들이 목 좋은 곳에 줄 지어 서 있었다. 조문객들이 안내에 따라 우르르 이동하고 목례를 ..
하다못해 떨어지는 낙엽도 아쉬운 법인데. 누군가 관련 기사에 이런 댓글을 남겼다. 하루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서 이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고 싶다고. 곧장 그 골목으로 뛰어가 모여있는 사람들을 전부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다고. 그랬다면 정말 모든 일이 쉽게 해결되었을 텐데. 우리는 그 무엇도 되돌릴 수 없는 현실에 남겨져 있다. 찬란하게 발전했다던 과학 기술은 좁은 뒷골목을 비껴갔고 카메라들만이 광기 어린 눈빛을 번뜩였다. 동시에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을 때까지 심폐소생술을 시도하던 사람들과 자신의 옷을 벗어 처음 본 이에게 입히고 간 사람도 있다. 우리는 이토록 다양하고 넓은 범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나는 할로윈 파티 예찬론자였다. 초중고 대학입시를 거친 뒤에도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출산 준비로 쉴 틈..
허리에 뜨개옷을 두른 가로수들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을 둘러싸고 노란 잎을 흩뿌리고 있었다. 유명한 덕수궁 와플집 옆으로는 스무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줄을 섰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달콤한 냄새에 놀라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그 치열하고 침 고이는 광경을 발견한다. 승자들은 따끈한 와플이 든 봉투를 쥐고 서둘러 자리를 뜬다. 포근한 날씨에 몸이 풀린 나들이객들이 덕수궁 담벼락 앞에서 한 컷, 노란 단풍나무 아래에서 한 컷, 예쁜 뜨개옷을 부여잡고 한 컷 바지런히 셔터를 누른다. 이렇게 다들 길을 막고 서있으면 빨리 미술관으로 갈 수 없다. 사람들을 일렬로 줄 세워 집에 돌려보내는 상상을 하고 있었는데 뜨개옷을 두른 가로수 허리를 붙잡고 한쪽 발 끝을 애교스럽게 든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할머..
집에 돌아와 보니 문고리에 종이 가방이 걸려있다. 가방 속엔 새 양말 다섯 켤레가 들어있다. 아마도 자주 마주치는 마을 할머니 중 한 분일 것이다. 새로 이사 온 동네에서 또래 친구는 사귀지 못했지만 매일 마을 입구 정자에 앉아 하늘 구경하는 할머니들과는 꽤 반가운 사이가 되었다. 내 강아지 란마를 발음하기 어려워 아무렇게나 내키는 대로 부르는 할머니들. 저번엔 세주네* 할머니가 란마를 알콩이라고 불렀다. 도대체 란마가 어떻게 알콩이가 되었지? 생각하면 웃음이 나와 그 뒤로는 나도 종종 란마를 알콩이라고 불렀다. 부르다 보니 역시 란마보다는 알콩이가 입에 착 감긴다. 이전 동네에서도 그런 할머니들이 있었다. 집 앞 평상에 매일 식사 시간 전후로 모여 수다를 떨고 마늘을 까고 부침개를 노나 드시던. 그러나..
열여덟 살짜리가 쓴 진로계획서 그 종이 쪼가리 어느 구석에 미래에 대한 구속력이 있었으랴. 사회생활 데이터가 부족한 당시의 상상력으로는 공무원/회사원/선생님/자영업 이외의 직업군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 외의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번다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미술대학에 가겠다는 결정은 상기한 직업의 범주에서 벗어나 마치 제3세계로 망명하겠다는 선택처럼 비장하면서도 무책임한 각오가 필요했다. 내가 미술학원에 매달 45만 원가량을 꼬박꼬박 납부하며 미지의 미래를 위해 오른쪽 어깨 근육을 혹사하는 동안 어떤 친구는 뜬금없이 발레에 매진하겠다고 했다. 뜬금없기로서는 내가 미술대학에 가겠다고 선언한 것과 피차일반이었을지 모르나, 아무것도 모르던 고2의 눈에도 발레를 배워 돈을 버는 ..
창 밖으로 내리는 비에는 차가운 악의가 있다. 나무 한 그루라도 주저앉혀야 속이 풀릴 것처럼 쏟아지고 있다. 이따금 무거운 빗줄기가 바람에 떠밀려 꿀렁 휘어진다. 깜짝 놀란 가로등 불빛이 함께 들썩인다. 함께 사는 강아지는 왜 밤 산책이 미뤄지는지 충분히 안내받지 못했다. 답답한 표정으로 발치에서 조바심을 내다가 내 허벅지를 벅벅 긁는다. 킁킁 코를 묻히며 참견하는 데도 나갈 기미가 없자 풀썩 드러눕는다. 답답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루 종일 내린 비에 제습기와 에어컨을 번갈아 껐다 켰다. 그야말로 홀로 입사 일주년을 기념하기에 딱인 날씨다. 어쩌다 보니 오늘에 와 있다. 아빠는 내 팔의 문신을 볼 때마다 평생 취직 못 할 거라고 소리쳤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번 시월로 벌써 입사 일주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