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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내가 만들 가족에는 반장 제도가 있다. 반장은 가족 회의를 주관하고 집 게시판을 관리할 수 있다. 가족 회의에서는 간식 메뉴라던지 주말에 보러갈 영화 같은 중대 사항을 논의하거나 각자의 스케줄을 발표하고, 새로 사귄 친구를 소개할 수도 있다. 집 게시판에는 가족들이 먹고 싶은 메뉴 후보가 붙어있고, 건의사항, 이를테면 화장실 휴지를 다 쓰고 새 것으로 바꿔놓지 않는 비양심 구성원에 대한 성토가 붙어있다거나 다음 반장은 이러저러한 사람이 뽑혔으면 좋겠다는 체제 전복적인 궁시렁도 붙을 수 있다. 반장은 두 달씩 돌아가며 맡는다. 반장은 임기 동안 한 가지 규칙을 제정할 수 있다. 반장의 기분에 따라 두 달 동안 노란 양말을 신어야 할 수도, 매일 콧구멍 사진을 찍어야 할 수도 있다. 반장의 규칙이 얼토당토 ..
손편지 보내게 주소 좀 알려달래도 자꾸만 카카오톡으로 불쑥 말을 거는 영국의 친구야, 나는 애인이 아니면 도통 메시지를 주고받지 않는다. 오만 애들과 하루 종일 카톡으로 떠들던 이십 대 초반으로는 영영 돌아갈 수가 없어. 수업시간 내내 쓴 편지를 쉬는 시간에 친구와 교환하고 또 수업시간 내내 그 답장을 쓰고, 학원에 가서도 마저 쓰던 중학생의 나는 지금의 나를 보면 실망할지도 몰라. 얼굴을 보고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 사이의 물리적, 시간적 거리를 좁히고 싶은 마음은 내게도 있어. 그 방법을 다르게 생각할 뿐이지. 우선 서로의 일상을 곁눈질로라도 체크할 수 있는 SNS도 좋아. 네가 있는 곳에서 보고 듣는 것들을 이미지와 텍스트로 모아놓으면 바쁜 날엔 하트만 대충 누를 수도 있지만 어떤 날엔 댓글을..
혼자 점심을 먹으면 반 공기를 남긴다. 퇴근 즈음엔 허기에 사로잡힌다.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는다. 집에 돌아가 멍멍이 산책 후에 저녁을 먹으려면 두 시간은 지나야 한다. 그때까지 못 기다려. 이른 저녁을 배달시켜 허겁지겁 먹었다. 몇 입 삼키기도 전에 가슴이 턱 막힌다. 먹은 그릇을 씻는 도중에 몇 번이고 가슴을 쳤다. 보안키를 찍고 회사를 나와 곧바로 편의점에 갔다. 까스활명수 한 병에 천 원. 편의점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전부 들이킨다. 병은 길가 전봇대 아래에 쌓인 분리수거 봉투에 쏙 집어넣었다. 답답한 가슴은 뚫릴 기미가 없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멍멍이랑 오십여 분을 걸었다. 나는 죽상인데 멍멍이는 신나서 히히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남산 아래도 돌고 전망대도 다녀왔다. 그제야 ..
내 강아지는 겁이 많다. 빗방울이 덤불 위로 투둑, 우비 위로 투둑 떨어지는 소리에 매번 깜짝 놀라는 바보 란마. 그러나 비가 와도 산책은 꼬박꼬박 가셔야 하는 성실한 우리 멍멍이. 이렇게 심약한 멍멍구에게는 노즈워크 장난감을 추천한다. 사람보다 후각이 발달한 개는 장난감 속에 숨겨진 간식 냄새를 코로 쫓으며 스트레스를 풀고 자신감을 얻고 어쩌구 한다니 당연히 사줘야지. 영하의 날씨에 산책을 나섰다가 애견용품점을 발견하고 뒷걸음치는 어른 개를 설득해 밝고 따뜻한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님이 추천한 노즈워크 장난감 중 삑삑 소리가 나지 않으며 빠르게 이리저리 구르지 않는 걸 고르고, 강아지 전용 땅콩버터와 전용 패드도 샀다. 분리불안이 심한 강아지에게 외출 시 주면 좋은 이 땅콩버터는 성분도 안전하고 한국에..
전라남도 고흥군에 왔다. 서울역에서 공항철도를 타고 김포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여수공항에 내려 또 차로 고흥에 왔다. 왜 왔냐면, 회사에서 가자고 해서 왔다. 덕분에 동네 맛집도 가고 바닷바람도 쐬고 좋다. 내 돈 안 쓰고 멀리 와서 맛있는 거 먹으려면 전생에 동네를 구해야한다. 내가 구했던 동네는 어디였을까. 이틀 내내 숙소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오늘 날짜(01/24)로 카카오맵 평점 2.8을 받은 순천횟집. 후기를 읽어보니 불친절하다고 실망한 사람이 많다. 이렇게 인구가 적은 마을 구석에서 호텔급 친절을 기대하면 절대 실망만 얻을 터이니, 그러지 말자. 어제는 병어 조림, 오늘은 삼치회와 삼치 유자조림을 주문했다. 고슬고슬하고 찰진 밥에 유난히 달달한 배추로 만든 김치, 유자연근조림, 굴..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다짐했다. 두 번 다시 일찍 일어나지 않겠다고. 새벽 1시가 넘어 잠들고 아침 6시에 일어나 8시에 등교하는 수험생 생활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공부엔 불만이 없었는데 잠을 재우지 않는 사회는 싫었다. 간첩 고문하는 것도 아니고 왜 잠을 못 자게 해. 잠이 부족해서인지 스트레스 때문인지 유독 고등학생 시절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 대학생이 되고 첫 학기 시간표에 월화목금 1교시를 넣는 클래식한 우를 범해버렸다(1학년 기초 수업이 대부분 1교시에 시작하기도 했고). 덕분에 출근길 직장인들이 마귀의 얼굴로 들끓는 1,2호선에 매일같이 발을 들여야 했다. ‘1호선-신도림-2호선’ 구간에는 또 어찌나 광인의 밀도가 높았던지. 이 구간 어딘가에 그런 사람들이..
종점에서 타느라 버스에 기사랑 나랑 둘만 타있는 경우가 많다. 원래는 기사한테 인사 잘 하는 싹싹한 나였지만 언젠가 단둘이 있을 때 이렇게 단둘이 있으니 아주 오붓하고 좋구만 하는 개소리 듣고 난 뒤로 인사 씹는 청년으로 변모한 나
사파리로 이미지 업로드가 안된다. 왜죠. 일러스트레이터 과외는 좋은데 복습할 시간이 없어서 배우고 계속 까먹는 중... 바로바로 복습하지 않으면 날아가는디..
속한 모든 집합에서 벗어나고 싶다.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깊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 현대인의 미덕이라 여겼다. 괜히 사적인 연을 이어나가려 했다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 걱정도 했다. 그런데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함께 돈도 벌고 프로젝트도 이뤄나가고 있는데, 정으로 만난 사람들에게선 날이 갈수록 뭐 하나 얻어가는 게 없다는 삐딱한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콩고물을 바라며 누굴 사귀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말 할 자격이 없지. 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고 믿어. 함께 있을 때 즐거울 수 있기만을 바랐던 사이에서 왜 즐거움마저 얻을 수 없을까. 스스로를 가엽게 여기는 것만은 징그럽고 짜증나는 일이니까, 시퍼런 칼날 같은 농담으로 바꿔 흔들고 던져버리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싶다. 내 ..
다들 진짜 선배가 있는 걸까. 일본 학원 만화에서나 보던 그 단어. 내 인생에서는 쓸 일이 없었다. 엣센스 국어사전에서는 선배 先輩를 ‘1.같은 분야에서 학문·경험·연령 등이 나보다 많거나 나은 사람, 2.자기의 출신 학교를 먼저 졸업한 사람’이라는데, 역시 떠오르는 얼굴이 없다. 혹시 내가 지금껏 이 모양 이 꼴인 게, 변변한 선배가 없어서?! 나보다 어리고 경력이 짧은 사람의 실수는 대수롭지 않은 데 비해 연장자의 실수나 못난 모습은 유독 거슬린다. 존댓말 듣고 반말하는 사람이 그런 대접 받을 만한 행동거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내 눈빛은 오랜 재판에 지친 배심원의 그것이 되어버린다. 또 연장자 눈에 잘 보이려 고민하는 것보다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의 평가를 듣는 데 더 신경 쓰곤 한다. 연장자나 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