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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0516 월 / 오월 찬가 / 긴개 본문
이사 온 동네에서 가장 반가운 건 역시 아카시아 나무다. 출퇴근 할 때 마을버스를 타고 고작 두 정거장을 이동하는 대신, 산을 구불구불 가로지르는 하나의 길을 따라 약 25분 가량을 걸어다니기로 했는데 처음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때는 그들도 조용히 꽃송이를 다물고 있었을 때였다. 그러나 이사한지 일주일이 지나갈 무렵 도저히 코를 킁킁대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진하고 매혹적인 향기가 산 전체에 스며들었고 그제야 이 산 전체에 높이 10미터는 족히 넘을 아카시아 나무들이 서로 손에 손을 잡듯이 빼곡히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매년 피어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두 종의 꽃 중 하나가 이렇게 집 가까이 가득하다니 1.6배 오른 월세가 아깝지 않았다(다른 한 종은 수수꽃다리이다).
아카시아 군락 속을 걸을 때는 언제나 들숨 뒤를 따르는 날숨이 야속할 정도로 언제까지고 들이 마시고 싶다. 그게 어렵다면 입 속에 후각 세포를 이식한 뒤 입을 크게 벌린 뒤 걸어다니고 싶다. 이 향긋한 공기를 밀봉해서 집 안 전체를 채우고 향수로 만들고 싶다. 이 때문에 이십 분이면 족히 지나칠 짧은 길을 나는 삼십 분, 오십 분, 한 시간까지도 걷게 된다. 머리 위를 삐빗 날아다니는 박새와 겁도 없이 가까운 나뭇가지를 쏘다니는 짙은 주황빛의 곤줄박이, 나무를 휘릭 휘감는 하늘빛의 물까치 무리까지 맞닥뜨리고 나면 산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직장에 도통 가까워지기가 어려워진다. 오월의 푸른 산은 이렇게 요란하다. 일 년 내내 할 말이 많은 직박구리들을 제외하고도 말이다.
고등학생 때 미술학원이 끝나면 전철을 탔다. 음식 냄새 풍기는 취객들 타기 좋은 시간이었다. 집 동네에 도착하면 밤 열한 시가 넘었다. 오월의 밤, 전철이 역에 정차하고 문이 열리면 내가 미처 내리기도 전에 어두운 하늘 어딘가에서 달콤한 아카시아 향이 쏟아져 들어왔다. 반복되는 입시 미술 연습과 아쉬운 실력, 성적, 경쟁, 질투, 좌절 등으로 어둡고 괴로운 입시생 시절에 죽고 싶을 때였다. 사는 건 지루하고 어른이 되어도 이 괴로움이 여전할 것 같았다. 매년 유서를 갱신했고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위로 해줄 사람도 없었다. 별 수 없던 그 시절. 그러나 오월 밤에는 살고 싶었다. 이 향을 내년에도 맡고 싶었다. 이 속에 파묻힐 날이 앞으로도 있다고 생각하면 어깨염증도 한결 견딜만했다. 황홀한 향에 눈가가 시큰했다. 카라멜 녹듯 오월이 길게 늘어나 주었으면. 그래서 살고 싶은 날이 계속 이어졌으면.
기후 위기로 많은 즐거움들이 사라져가는 상황에서도 아카시아 나무는 여전히 내 명줄을 이어가고 있다. 모든 생물종이 언젠가는 멸종한다. 그 중에서도 아카시아 나무는 나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되도록이면 인류보다 오래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너무 쉽게 구원으로 여기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렇지만 아카시아는 괜찮지 않을까. 가시를 떼어 코 끝에 붙이면 코뿔소 놀이를 할 수 있다. 편지 담은 나뭇잎을 나무에 꽂을 때 그 가시를 압정처럼 쓸 수 있다. 아직 먹어본 적은 없지만 튀긴 꽃이 맛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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