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0425 월 / 오메기떡 긍정편 / 긴개 본문

2021-2023 긴개

0425 월 / 오메기떡 긍정편 / 긴개

긴개 2022. 4. 25. 22:41

 

 

 

 

 

 

 환승할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에 서 있던 5분 동안 문득 생각했다. 어떻게 두 발을 딛고 서있는 걸까. 발바닥과 복사뼈, 무릎 관절과 배꼽 아래가 전부 토도독 흩어져 쓰러질 수도 있잖아. 발아래, 신문을 펼친 정도의 좁은 땅은 언제든지 계란 껍데기처럼 잘게 조각나 그 사이로 스르륵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저 멀리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아래는 크고 단단하고 두꺼운 지구가 받치고 있다. 축축하고 더운데 사람들 뒤로 아지랑이가 보인다. 걱정 없는 사람들이 앞으로도 뒤로도 바쁘게 가버리고, 나는 몸을 멀쩡히 세워놓고도 자꾸 떨어지는 기분이다. 노트북이 든 가방이 어떻게든 나를 땅에 메다꽂을 것만 같고. 

 

 

 대체로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다. 왜냐하면 선택지가 둘 뿐이기 때문이다. 너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긍정적으로 볼래, 부정적으로 볼래? 선택하라면 역시 긍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 외의 선택은 괴로워 감당할 수가 없다. 잘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좋게 좋게 해석해야만 한다. 입에 쓴 풀이라도 어딘가 몸에 좋으려니 하고 씹는 수밖에 없다. 슬프다고 언제까지 울고만 있을래, 아니면 자기 계발해서 어제의 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될래? 물으면 그저 울고만 있을 수 없다. 책도 더 읽고 운동도 하고 자주 씻기도 하고 업그레이드된 사회성도 내보여야 한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슬프고 괴로울 시간이 없다. 그 대신 우두커니 멍 때리는 시간이 늘어났다. 맨바닥에 앉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흘려보낼 수 있다. 죄책감이나 외로움이나 불안 같은 것들을 꼼꼼히 살피고 진단하는 대신 깨진 벽 속에 넣고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처럼 콘크리트로 발라버리면 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양이는 운다. 곧 도끼가 등장한다. 

 

 

 냉장실에는 이제 남은 것이 별로 없다. 그 대신 냉동실에는 제주 오메기떡이 잔뜩 들어있다. 달고 부드러운 팥앙금이 들어있는 쫄깃한 오메기떡은 먹기 전에 실온에서 두세 시간 넘게 해동을 시켜야 한다.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한 순간부터 말랑한 떡을 입에 넣기까지 두 시간은 넘게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메기떡은 먹고 싶기 전에 미리 꺼내놔야 한다. 언제 먹고 싶을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 꺼내놔야 한다. 미래의 나는 오메기떡을 먹고 싶을 것만 같다. 짱돌 같은 오메기떡을 식탁에 올려놓고 오며 가며 입맛을 다신다. 이젠 녹았나? 지금은? 그럼 지금은? 맹금류의 발톱 같은 검지 손가락에 수없이 찔리고 나면 떡은 입 속에 굴리기 완벽한 상태가 된다. 이제 그때가 온 것 같다. 조금 남은 위스키를 유리잔에 따랐다.

 

 

 개봉한 지 한 달이 넘은 이 위스키는 어느새 연한 노란색에서 진한 황금색으로 변해있었다. 마개를 열자마자 향이 코 아래를 훅 끼칠 정도로 진하고 달다. 얼음을 채운 잔에 살짝 따른다. 위스키는 빙하가 녹은 물처럼 얼음 사이를 휘감는다. 이제 아까 꺼내놓은 오메기떡을 뜯는다. 떡고물이 떨어질까 조심스레 깨물었더니 딱딱하다. 앗차. 위스키가 성급했다. 얼음은 빙하처럼 자꾸 녹아 위스키를 밋밋하게 만들고 있는데 오메기떡은 지구온난화를 잊은 듯 속내를 단단히 감춘다. 안주로 함께 먹으려던 떡은 제사상에 올려놓고, 점점 재미없어지는 위스키를 후르릅 들이킨다. 안주 없는 위스키는 완벽한 구원이 될 수 없다. 떡 눈치만 보다 전부 마셔버린 술기운이 천천히 올라온다. 그러다 그만 잠이 와서 이도 닦지 않은 채 이불속에 기어들어갔고, 아침에 일어나 식탁을 보니 글쎄 꼴도 보기 싫은 오메기떡이 흐물흐물해져 있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