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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얼굴은 당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마에서부터 눈썹, 눈매, 콧대, 뺨, 입술, 턱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생겼는지 살피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인생을 점칠 수 있다는 말이다. 비록 내 이 분야의 배움이 짧고 경력이 미천하지만 짧게나마 관상에 대해 쓰려하니, 잠시 남자친구의 얼굴을 빌려 예를 들어볼까 한다. 우선 남자친구는 참 잘생겼다. 그 시작은 정갈한 이마에서부터 시작된다. 고르게 솟은 이마는 짙은 머리와 깔끔하게 경계를 이루어 더욱 말갛게 보인다. 이런 이마는 대개 정직하고 허세를 싫어하는 성격이며 아주 내 이상형과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자리에서 솟아난 두툼하고 검은 눈썹은 그 꼬리까지 촘촘하게 자리를 잡았으며 윤기가 흐른다. 이를 통해 요령 피우지 않..
오가는 사람들 옷차림이 두툼하다. 앙상한 가지는 냉정한 바람의 눈을 피해 나뭇잎 몇 개를 숨겨두었다. 손가락은 주머니 깊은 곳에 숨어 두 번 다시 나오지 않기로 다짐했다. 언제부터 개시했는지 모를 붕어빵 장사가 거리 곳곳에서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다. 잡화점들은 앞다투어 크리스마스 카드와 선물하기 좋은 물건들을 가장 눈에 띄는 매대에 진열해두었다. 이런 장면들은 모두 시각을 활용해 계절을 추리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계절은 눈으로 알아보기가 이렇게 쉬운데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 알 수가 없다. 몇 년을 가깝게 지낸 사람이 알고 보니 생명을 얻은 폐기물이었다는 것을 첫눈에 알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운 내면을 갖고 있고 그걸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과거의 당찬..
『움직임의 뇌과학』, 캐럴라인 윌리엄스 지음, 이영래 옮김, 갤리온, 211205 캐럴라인 윌리엄스Caroline Williams는 영국의 과학 저널리스트이자 에디터. 엑서터대학교에서 생물학 학사 학위를, 임페리얼칼리지 런던에서 과학 커뮤니케이션 석사 학위를 받았다. 《뉴 사이언티스트》에 정기적으로 과학 칼럼을 기고하며 BBC 라디오 제작자, 《뉴 사이언티스트》 팟캐스트의 공동 진행자로 일했다. 전작으로는 신경가소성을 주제로 뇌의 능력을 탐구한 『나의 말랑한 뇌』가 있다. 새롭고 흥미로운 과학적 사실을 더 많은 사람에게 공유하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 캐럴라인 윌리엄스는 『움직임의 뇌과학』에서 움직임이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한 최신의 연구들을 소개한다. 이 분야의 과학자들은 물론 몸과 정신의 ..
말 한마디마다 세금을 매겨야 한다. 그 말에 책임을 지겠다는 서명도 필수다. 말을 침처럼 내뱉기 전에 여러 검사기에 넣고 탈탈 돌려 안전성을 시험해야 한다. 오랫동안 세밀하게 다듬어낸 말만 조심스럽게 주고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 말에 스민 독이 얼마나 집요하고 치명적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중독된 후이다. 미리 조심하라고 여기에 알린다. 가까웠던 사람이 알고보니 악질의 사기꾼이었다. 1년 넘게 알고 지냈는데 지금까지 했던 모든 말이 거짓이었다. 친구들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친구로서 아끼고 존중했기에 무슨 말을 해도 주의 깊게 들어주고 잘 풀리기를 바라며 응원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우리를 누구든 상관없을 방청객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코로나로 많은 친구를 만나기 힘들었지만 우리는 자주 만났다. 이..
천국은 아마 사람과 사람이 물 흐르듯 어렵지 않게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곳일 거야. A를 말하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A로 들어주고, 고맙다 말하면 정말 고마운가 보다 하고 들어주는 곳. 대화하면 할수록 응어리가 풀리고 타인과 나의 경계가 부드럽게 허물어지는 곳. 내가 사는 세상은 그 반대야. 말은 의도하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해. 이렇게 오류가 많은 전달 시스템이 왜 아직도 주요하게 쓰이는지 신기할 따름이야. 말이 웃음을 빚고 마음도 전하려 했지만 어쩐지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지.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 시절도 있었다던데. 세상의 모든 균열이 말로부터 나왔다면 우리의 입은 성인식 때 꿰매져야 해. 책임도 지지 못할 말들을 눈보라처럼 퍼트려 놓고 정작 난처할 땐 뒷짐만 진다고. 그런 허풍선이는 대..
그 촌 동네에서 외할아버지는 매끈한 빽구두를 신고 다녔다. 마을에 티비도 몇 개 없던 시절에 돈을 내고 춤도 배우러 다녔다. 그동안 외할머니들은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고 밤나무도 길렀다. 아들 셋, 딸 둘에 남편까지 먹여 살리려 양계장을 치고 쌀집을 열고 월세방을 굴렸다. 아스팔트도 없던 흙길을 흰색 양복 차림으로 순회하던 할아버지는 학비가 아깝다고 엄마의 고등학교 입학을 반대했다. 이모의 도움으로 입학은 겨우 했지만 교통비 타낼 곳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엄마의 결혼식에도 한 푼 보태지 않았다. 그 답례로 엄마 역시 할아버지 장례식에 눈물 한 방울 보태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모르고 있었다. 두 번째 할머니가 어디엔가 살아계신 것도 잊었다. 근데 할아버지 장례식에 왜 나를 안..
의자에 앉아 핸드폰 화면만 엄지로 밀고 당긴 게 벌써 한 시간째이다. 무기력한 이 모습은 바로 우울의 신호지. 우울하다고 행인에게 새총을 쏘거나 횟집 물고기를 훔치지 않는 고도로 사회화된 나를 칭찬한다. 술에 취해 운전하거나 사람을 괴롭히는 건 감형받지만, 우울하다고 그런 행동을 해선 안 된다. 행인들 주머니에 쓰레기를 넣어도 안 된다. 우울한데 좀 봐주면 안 되나? 안된다. 이럴 때일수록 귀부인의 몸가짐이어야 한다. 나는 지금 귀부인. 나는 지금 귀부인. 마음의 평정을 찾고 싶을 때 성숙한 사람들은 요가를 한다. 오전 열시 반에 매트 위에서 다리를 머리 뒤로 넘기며 땀을 좀 흘렸다. 이럴 때일수록 식사도 신경 써야지. 맛있는 과일 샐러드에 치즈빵을 먹었다. 스스로 깨끗이 씻겨놓았다. 무릎에 앉은 고양도..
병 씨 성을 갖고 태어났더라면 꼭 등단해서 시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터뷰 하러 온 기자가 민망한 표정으로 나를 ‘병 시인님-’하고 부르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볼거다. 그러나 한국에 병 씨는 없으니 변 씨로 타협하겠다. ‘변 시인님-’하고 부르는 사람들이 움찔움찔 웃음을 참는 모습을 보고싶다. 다른 성 씨는 재미가 없다. 나 대신 변 씨 성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장래희망으로 시인을 고려해주었으면 한다. 주인공이 까마득히 높게 날았다가 로켓처럼 빠르게 콘크리트 바닥으로 주먹을 내리꽂는 히어로 영화를 좋아하는 내가 어쩌다 *을 보았다. 주인공은 패터슨, 버스 기사이다. 퇴근할 때 버스가 배트카처럼 변하지도 않고, 마지막에 내리는 승객을 연쇄 살인하지도 않는다. 놀라운 운전 실력을 살려 투잡을 뛰지도 않는..
출근길 버스를 기다리는 아침이었다. 작은 로터리를 둘러싼 가로수 아래로 노란 점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걸 보고 있자니 고등학생 때가 떠올랐다. 반 애들이 쉬는 시간에 우르르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더니 교정의 은행나무 아래를 폴짝거렸다. 떨어지는 이파리를 땅에 닿기 전에 잡으면 대학에 붙는다는 소릴 듣고 그러는 거였다(정민 씨는 이 말을 듣고 추풍낙엽 전형이냐고 했다). 그러고 있을 시간에 공부를 해야 대학에 붙지 않을까?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오늘은 나도 그러고 싶었다. 대학에 또 가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살랑살랑 떨어지는 잎이 갖고 싶었다. 은행나무 아래에서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낙엽은 모기보다 잡기 어려웠다. 속도도 훨씬 빠르고, 무엇보다 방향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왕창 떨어지..
망아지 끼니 챙기기 핸드폰을 켜보니 9시 51분. 요가 수업은 10시부터. 후다닥 나오다가 침실 문 앞에 웅크리고 있던 첫째 고양을 밟을 뻔했다. 바지를 다리에 끼우다 고무 밴드에 발가락이 걸려 비틀거렸다. 열쇠를 챙겨 문밖을 나섰다. 내리막길을 슬리퍼로 짝짝 뛰어 내려가는데 양 볼이 낯설게 상쾌하다. 왔던 길을 도로 뛰어 올라가 현관문을 열고 마스크를 집어 들었다. 다시 내리막길을 짝짝. 3분 거리의 요가원에 도착해 숨을 고르고 자리에 앉았다. 땀을 삐질 흘리며 관절을 어색한 방향으로 꺾는다. 긴 몸뚱이는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엉성하다. 다섯 달째 요가원에 다니고 있는데, 여전히 할라아사나*와 살람바 시르사아사나**가 어렵다. 다른 자세도 어렵지만 이건 나아질 기미가 없다. 언젠가는 되겠지 느긋하게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