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0502 월 / 강남구 공돌이 파티에 가지마시오 / 긴개 본문

2021-2023 긴개

0502 월 / 강남구 공돌이 파티에 가지마시오 / 긴개

긴개 2022. 5. 2. 23:44

 



 

 내가 나에게 해주는 좋은 말들은 탁 트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서 외치는 소리처럼 잘 전해지지 않는다. 반대로 남이 내게 해주는 구린 말들은 아무리 먼 곳에서 소근거려도 고막에다 바로 때려박는 것처럼 생생히 들리는 데다가 온 몸에 붙은 고양이털처럼 쉽게 떨쳐내기가 힘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자랑스러워 하려다가도 오래전에 들었던 어떤 말 하나 때문에 입술만 달싹이다가 그치곤 했다. 그 말은 사실도 아니고 영양가도 없고 더럽게 재미도 없었지만 고등학교 졸업사진처럼 끈질기게 내 발목을 잡았다.

 

 

 남의 말로 족쇄를 차는 것은 불행하다. 차라리 모래 위에서 타이어를 끌면 근육이라도 늘텐데 족쇄는 갈수록 발목을 조여 한 걸음 떼기도 힘들게 된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잠시 유체이탈을 해야한다. 지친 몸에서 잠시 빠져나와 두세 걸음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면 쇳덩이처럼 무겁고 가래처럼 찐득하게 붙어있던 그 족쇄가 사실은 그저 단어 몇 개 였다는 것을, 그 원본은 오래전에 바래고 희미해졌지만 나의 괴로움이 되려 그것을 지금껏 붙들고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내 경우의 ‘금세’는 대략 7년이 걸렸다. 

 

 

 “아는 언니 파티한대. 놀러가자!”

 

 

 친구의 제안에 강남구 어딘가에 도착했던 날, 나는 파티가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매일 마포구만 쏘다니다가 혼자 처음 강남에 와본 이십대 초반의 나는 큼지막한 건물들과 넓은 거리에 주눅이 들었다. 이 동네는 그래피티가 없나? 작은 카페나 상점들은 어디에 있지? 잠시 앉아 쉴 만한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땅 값도 비싼 동네인데 빌딩의 1층들은 어째 공간을 허투로 낭비하는 듯 했다. 그 넓은 홀에 차만 몇 대 전시해 둔다던지 의자도 없이 텅 빈 로비로만 쓰이는 곳이 많았다. 저렇게 남는 공간에 책이나 간식을 많이 쌓아두면 좋을텐데. 이 빌딩 주인들은 통이 되게 큰가? 뭔가 재미있는 구석을 만들어두고 싶은 마음이 없나? 친구가 올 때까지 나는 나와 영영 상관 없을 세계를 하염없이 서성였다. 친구를 만나 파티 장소에 갔더니 파티는 아직 시작 전이었다. 시간에 맞춰왔는데 왜 시작 전이지? 파티엔 적당히 늦게 가야 뻘쭘하지 않다는 걸 그 때의 나는 알 길이 없었다. 또다시 어색한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파티가 시작되었는데, 그제서야 나는 내가 무슨 파티에 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대개 파티라고 하면 주제가 무엇이든 일단 술 한 잔 하고 춤도 추고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의미 없는 말을 떠들거라 짐작했지만, 그 파티는 파티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의 작명센스에 희생된 불운의 이벤트였다. 그러니까, 무슨 공대생 프로그래밍 파티였던 것이다. 여러 공돌이들이 굳이 시끄러운 음악이 나오는 그럴듯한 공간에 모여 팀별로 뭔가 자판을 두드려 시간 내에 빨리 성과를 내고 상을 받는 그런 파티. 술 한 잔 하고 춤도 추고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내가 영영 정 붙이지 못할 동네에서, 내가 영영 재미없어 할 이벤트에 참석해 영영 잊지 못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파티에 초대했다던 그 언니를 만난 것은 어색함에 몸부림치면서도 집에 갈 타이밍을 몰라 괴로워하던 중이었다. 친구의 소개로 인사를 나누다 언니에게 내가 타투이스트라는 것을 알렸더니 언니는 재미있어하며 나중에 자기도 하나 받고 싶다는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건넸다. 그 때 친구가 말했다.

 

 

 “근데 얘 그림은 못 그려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우리는 같은 미술학원에 다니며 친해진 사이였다. 친구는 현역으로 입학한 학교에 나는 재수를 해서 들어갔다. 고3 때 유학을 고려해 입시의 방향을 바꾸었으나 집안 사정으로 여의치 않게 되었고, 결국 재수로 같은 학교 같은 과, 한 학년 선후배가 되었다. 나는 그 친구를 퍽 좋아했다. 야무지고 내가 모르는 것을 많이 알았고 그림도 잘 그렸다. 닮은 면도 있었지만 나와는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재수하는 동안에는 잘 연락하지 않았지만 다시 학교에서 만나 반가웠다. 오래 볼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때까지 나는 내가 그림을 못 그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실기시험을 치루고 1년 장학금도 받고 들어갔으니까. 그 친구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잘 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왜 이 친구는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내가 직업으로 진지하게 고려하는 일의 자질을 깎아내린걸까? 친구는 웃으며 말했지만 진심이었고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당연히 분위기는 급속히 싸해져 자리는 금세 파했고, 나는 혼자 집에 돌아가는 동안 장문의 메세지를 보냈다. 왜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나를 깎아내렸느냐고, 그 말 때문에 기분이 아주 나쁘고 자존심이 상한다고. 그랬더니 그 친구의 답장이 너무 놀라웠다. 

 

 

 “너는 평소에 나를 못생기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그랬다고?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중고등학교 때 남자아이들 앞에서 누군가 나를 못생기고 더럽다는 말을 한 뒤로 큰 충격을 받고 절대 친구에게 외모를 평가하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기 때문이었다. 친구 이마에 손톱만한 여드름이 나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여드름이 난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스트레스 받고 있을 테니까. 살에 대해서, 외모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을 꺼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내가 유독 경계하고 싫어하는 행동을 좋아하는 너에게 했었다고? 언제? 내게 또다른 자아가 있어서 지금의 내가 기절하면 다른 내가 깨어나 남들에게 그런 폭언을 하고 다녔나? 믿기지 않았지만 확신할 수도 없었다. 정말 그런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아예 기억이 나지 않으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인지, 하고 잊은 것인지 확언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 친구가 내가 언제 어디서 그런 말을 어떻게 했다고 콕 집어 말한 것도 아니었다. 쓰레기를 줍고 있는데 버린다고 욕을 먹은 것처럼 억울하고 서운했다. 우리 사이는 그 이후로 영영 멀어져 버렸다.

 

 

 문제는 그 친구의 말이었다. 그 전까지는 생각도 해본 적 없었는데, 그 뒤로 나는 스스로를 ‘그림 못 그리는 사람’으로 단정지어버렸다. 이후 누군가 내 그림에 대해 칭찬하면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근데 사실 제가 그림은 잘 못 그려요.’, ‘사실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라곤 할 수 없죠.’, ‘사실 턱 없이 부족한 실력이지만…’ 그렇게 7년 넘는 시간 동안 나는 내 그림을 온전히 좋아하지 못하고 죄스러워했다.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영영 보지 않을 친구 좋으라고? 열심히 그려놓고도 남의 눈치를 보며 불안해하던 내 모습은 안쓰럽지만 멍청하다. 단 한 명이 한 마디 한 것 뿐이었다(나중에 생각해보니 엄마와 아빠도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그 말을 듣고 내가 취했어야 하는 행동은 하나 뿐이었다. 그 애의 시력과 판단력에 애도를 표하며 내가 라섹수술을 받았던 병원을 소개시켜주기. 그거면 충분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