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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에세이 (68)
성북동 글방 희영수
이틀 전 생일이었다. 그러니까 어린이날 전날인 5월 4일 말이다. 어렸을 땐 어린이날과 생일 선물을 쿨하게 퉁쳐서 하나로 주는 부모님 덕분에 생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생은 생일과 어린이날 받는 선물이 다른데, 나는 왜 하나로 끝인가. 그러나 어차피 부모님께 선물을 받아도 썩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게다가 선물을 보고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간 도리어 생일날 혼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엔 생일 선물의 개수나 여부에 연연하지 않으려 애쓰게 되었다. 차라리 받지 않는 것이 혼나기 싫어 억지로 기뻐하는 표정을 짓는 것보다 마음이 편하다. 우리 가족은 상대방 마음에 드는 선물을 고르는 것도, 선물을 받고 감사를 표하는 것도 서툴렀다. 엄마와 아빠 역시 선물을 받으면 여기저기 싸구려를 받..
애인과 헤어질 것 같던 순간도 지금처럼 불안하지는 않았다. 울분이 폐를 쥐어짜던 순간에도 한숨 정도는 시원하게 내쉴 수 있었다. 또 어떤 비극은 비웃음만으로도 물리칠 수 있었다. 허나 지금은 다르다. 입꼬리 양쪽에 무거운 추가 꿰인 듯 도무지 웃을 수 없다. 어깨 근육을 수축시킨 긴장이 가시질 않는다. 참다못해 터져 나오는 숨마저 스타카토로 조금씩 끊어 쉬었다. 삶의 ⅓ 분량이 통째로 삭제될 위기 속에서 나는 의자 위에 웅크리고 앉아 머리통을 양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칠 뿐이었다. 현대인의 자산 범위는 90년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게 큰 폭으로 확장되었다. 개인용 컴퓨터와 휴대전화의 보급으로 자신의 신체와 재화 같은 물질적 자산뿐만 아니라 온라인상의 기록과 같은 손에 잡히지 않는 무형적 데이터까지도 개..
이제 이 글에도 커다란 제목을 붙여볼까 한다. 짧은 분량의 에세이 쓰기를 시작한 21년 10월부터 지금까지의 나는 이를테면 운전 연수생에 지나지 않았다. 어디로 달릴 것인지 고민하는 것은 미래에 맡겨두고, 우선 페달이 어디에 있는지 백미러는 어떻게 봐야 하는지부터 천천히 감을 익혔다. 일 년 반 동안 일주일 한 편 쓰기를 수행했다. 그 덕에 이제 기계적으로 모니터 앞에 앉아 글자 수를 늘려가는 것은 익숙해졌다. 주어진 주제가 만만하든 만만찮든 개의치 않고(않은 척하고) 한 편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가까운 시일에 만들어진 기억 중 주제에 마침맞은 것이 있다면 신이 나서 빠르게 첫 문단을 채워간다. 반대로 한동안 머릿속에 드나든 적 없던 종류의 주제가 주어질 때는 두 번째 문단을 쓰는 와중에도 도..
지금을 미루고 있다. 지금은 단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준비하는 기간일 뿐이라고 되뇐다. 정확히 뭘 준비한다는 건지는 몰라도, 네 머릿속에 있는 그 대단한 미래를 위해 지금은 참아 견뎌내야 해. 하기 싫은 일을 처리하고 소중한 하루하루를 월급으로 교환해야지. 집세 내고 장보고 적금 넣고 공과금 내고 커피 마시고 나면 얼마 남지도 않는 돈이지만 다들 그렇게 살잖아. 징징댈 일이 아니야. 이렇게 말하고 나니 이제 정말 어른이 다 되었다는 걸 느낀다. 어른의 고민을 짊어졌구나. 얼레벌레 살아도 스스로를 책임지고 있다. 닥친 일에서 도망치기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어. 멋져. 대단해. 동시에 분하기도 하다. 결국 이런 어른이 되었네. 세상의 재미있는 일은 다 벌일 것처럼 으스댔잖아...
간절히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적이 없다고 말하면 대부분 놀란 표정을 짓는다. 물론 몇 번 가볍게 말한 적은 있다. 언젠가 대만에 가보면 재밌겠다-라거나, 일본에서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보고 싶다-하고. 그렇게 말한 뒤에 대만의 여행 후기나 일본의 가볼 만한 동네를 검색해보지는 않는다. 한때는 핀란드 작가 아르토 파실린나의 소설을 읽고 핀란드에 가보고 싶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잠시 떠올린 다음 여행이 실현되도록 행동에 옮기지는 않는 것이다. 이는 여행에서 크게 기대하는 바가 없기도 하거니와 아직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여행을 준비하는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에서 수많은 돌발상황을 맞닥뜨리고 해결하느라 진이 빠지는 탓도 있다. 또한 십 년이 넘도록 혼자서 네발짐승들을 키우고 있다. 이들에게..
에코샵홀씨의 창립 20주년을 기념하여 시청역 지하 워크룸에서 열린 강의에 참여했습니다. 첫 번째 순서는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장이권 교수님의 이었습니다. 1. 두꺼비의 소리 강연은 두꺼비의 소리 이야기로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커다란 암컷 두꺼비 위로 수컷 두꺼비들이 샌드위치처럼 쌓여 짝짓기 경쟁을 벌이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이때 좀더 암컷에 딱 붙어 있던 기존의 수컷 두꺼비가 삑삑 소리를 냅니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요? 동물들은 크기가 커질 수록 낮은 음역대의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도전자를 물리치고 싶은 기존의 두꺼비는 자신의 소리로 몸집을 과시하며 자신보다 작은 두꺼비에게 겁을 주고자 합니다. 만약 도전자가 듣기에 자신의 몸집과 비슷할 것 같은 소리라고 하면 겁먹지 않고 달려들겠죠. 영상 속 두꺼비들은..
희로애락의 일주일을 보냈다. 오랜만에 애인에게 크게 상심했다. 이후 일주일 간 끈질기게 대화를 나누었다. 매일 새로운 변주곡을 발표하는 작곡가처럼 우리는 같은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재차 살폈다. 그 사이 뒷산에선 올벚나무가 발 빠르게 흰 꽃을 피워냈고 잿빛 땅 위로는 초록 풀이 돋았다. 인류의 고민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산이 싱그럽게 몸을 풀었다. 우리는 이제 막 데뷔 앨범을 발표한 밴드 멤버들 같았다. 평행세계 중 가장 오합지졸인 셜록과 왓슨 같기도 했다. 또한 그는 옆 방에 사는 외국인 같기도 하고. 어딘가 다른 기억이 업로드된 그의 복제품 같기도 했다. 미래에 쌓여있던, 함께 내릴 결정들이 순식간에 신기루가 되던 그때, 나는 뻐근한 뒷목을 붙잡고 무게중심을 재빨리 내 쪽으로 옮겼다. 나는 이 사람..
벌써 아홉 달째 발레를 배우고 있다.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거나 퇴사를 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다. 그동안 허벅지 앞 근육이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고 복근도 선명해졌다. 이제는 꼿꼿이 선 채 엄지 발가락으로 방의 전등 스위치를 켤 수도 있고 발 끝으로 고양이를 쓰다듬을 수도 있다. 영화 에서 주인공 베아트릭스는 수년 간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다음 쇠약해진 몸의 근육을 깨우기 위해 스트레칭을 하는데, 이때 맨 처음 시도하는 것이 바로 발가락 구부리기이다. 그녀는 몇 시간 동안 트럭 안에서 발가락 하나하나를 굽히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린다. 영화 볼 때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던 그 장면은 발레 첫 시간에 불현듯 다시 떠올랐다. 이제껏 살면서 발가락을 구부릴 일이 없었단 나의 발가락 근육은 혼수상태..
대학생 때의 나는 찰스 부코스키에 빠져있었다. 1920년 독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미국으로 넘어온 그는 여러 잡일을 전전하며 글을 쓰다 이후 전업 작가가 되었다. 꽤 웃기는 아저씨였는데, 욕도 기똥차게 하고 글도 시원하게 썼다. 다들 쉬쉬하며 뒷골목에 보이지 않게 쑤셔 박아두는 쓰레기 같은 사람이었다. 성숙한 십 대라면 부코스키를 한두 장 넘겨봐도 된다. 이십 대라면 푹 빠져들 법하다. 그러나 삼십 대 이후에 부코스키를 미친 듯이 사랑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좀 멀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당시의 내가 알던 사람 중에 유일하게 어른 대접을 해줄 만한 사람은 찰스 부코스키가 유일했다. 어린 시절 나는 어른의 판단은 대개 선에 기초하리라고 믿었다. 전체 인구 중 악인은 소수이고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
확실히 우리 사랑은 어느 단계를 넘어섰다. 처음 함께 식사할 때는 밥을 반 공기나 남겼었는데 말이다. 마주 앉아 밥을 먹다 말고 앞니에 고춧가루가 꼈는지 콧물이 흐르는지 눈곱이 꼈는지 얼굴이 번들거리는지 신경이 쓰여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줄줄 흘리고 먹을까, 씹는 음식이 보일까, 한 숟갈 천천히 퍼서 살짝 벌린 입에 겨우 넣고 입술을 앙 다문 뒤 꼭꼭 씹어 꿀떡 소리가 들리지 않게 조용히 넘겼다. 밥을 다 먹고 물을 마실 땐 입을 헹구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빠르게 삼키느라 사레가 걸릴 뻔한 적도 있다. 연락이 오면 일 분 내로 답장을 하느라 하루종일 핸드폰과 마주하고 있었다. 아침 여덟 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새벽 네 시까지 대화를 멈출 수 없어 몇 달 잠을 설쳤다. 그래도 서로를 생각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