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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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2023 긴개

0507 토/ 2023 인간관계 성적표/ 긴개

긴개 2023. 5. 7. 01:17










이틀 전 생일이었다. 그러니까 어린이날 전날인 5월 4일 말이다. 어렸을 땐 어린이날과 생일 선물을 쿨하게 퉁쳐서 하나로 주는 부모님 덕분에 생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생은 생일과 어린이날 받는 선물이 다른데, 나는 왜 하나로 끝인가. 그러나 어차피 부모님께 선물을 받아도 썩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게다가 선물을 보고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간 도리어 생일날 혼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엔 생일 선물의 개수나 여부에 연연하지 않으려 애쓰게 되었다. 차라리 받지 않는 것이 혼나기 싫어 억지로 기뻐하는 표정을 짓는 것보다 마음이 편하다.

우리 가족은 상대방 마음에 드는 선물을 고르는 것도, 선물을 받고 감사를 표하는 것도 서툴렀다. 엄마와 아빠 역시 선물을 받으면 여기저기 싸구려를 받았다며 푸념을 늘어놓거나 민망할 정도로 화를 냈다. 함께 보낸 편지는 금방 버려졌다. 그렇다고 자식들에게 비싼 선물을 하지도 않았다. 너희는 지금까지 엄마아빠한테 온통 받은 것뿐이잖아. 그 말은 옳아. 기브-앤-테이크로 따지자면 나는 굉장한 빚쟁이니까. 앞으로 버는 모든 돈을 쏟아부어도 부족하겠지. 이럴 때를 대비해 엄마의 그 많은 가계부들이 쓰인 거잖아. 아마 평생 부모님 마음에 드는 선물은 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오로지 값나가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생일을 어떤 기분으로 맞이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웠다. 생일 몇 주 전부터 발을 동동 구르며 주변 사람들을 들쑤셔야 할까? 혹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생일이 다 지나간 후에 ‘난 생일 같은 거 안 챙겨’하고 쿨한 척 말해야 할까. 자기가 태어난 날을 타인에게 함께 축하하자고 요구하는 것이 자의식과잉의 민폐는 아닌지, 일 년 중 유일하게 나의 존재를 축하하는 날인데 유별나게 몸을 사리는 것이야말로 자의식과잉의 또 다른 면모는 아닌지, 매년 한 번씩 겪는 날인데도 여전히 어떤 태도여야 할지 알 수 없다. 새삼스레 주변 사람들은 생일을 어떻게 치르는지 묻고 싶어 진다.

생일은 일 년 간의 인간관계 성적표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아무리 신경을 끄고 싶어도 당일이 닥치면 당사자는 피할 수 없이 그 점수를 받아 들게 된다. 몇 명에게 축하 연락이 왔는지, 그중 몇 명이 선물을 보냈는지, 또 내가 선물을 보냈지만 도로 답례를 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지, 나 같이 생각을 여물처럼 곱씹는 사람은 다른 일에 몰두하다가도 문득 생일 생각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날 하루종일 말이다. 생일 생일생일 생일생일생….

그러다 보면 내가 연락에 소홀했어도 매번 고맙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 친구가 떠오른다. 여행을 가고 싶다는 내 말에 여행용 가방을 선물로 준 친구는 선물을 고르는 시간 내내 여행을 가서 기뻐할 나를 생각해 주었을 것이다. 생일이니 만나자고 약속해 준 친구들은 나를 위해 흔쾌히 소중한 시간과 돈을 지불하기로 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어도 나의 좋은 모습만 기억해 준 친구, 뜻밖의 친구에게서도 기쁜 마음을 받았다. 오직 나만을 위한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짜준 귀한 마음까지도. 각종 선물에 기쁘면서도 어쩐지 착한 척 노력한 모습에 순진한 친구들을 속아 넘긴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다.

베푼 것에 비해 받은 것이 많다고 판단되면 인간관계 성적표의 상/중/하 중에서 ‘상’을 받았다고 봐도 될까. 이 ‘상’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아마 이런 것이리라. ‘최근 너의 태도가 봐줄 만했다’, ‘주변 사람들이 너를 이렇게 생각해주고 있다’, ‘앞으로도 정진하라’, 혹은 ‘같이 지내기에 나쁘지 않았다’ 등등. 그렇게 생각하니 뿌듯하다. 스스로를 꽤 좋은 사람으로 보아도 될 것만 같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성적표에서 ‘하’를 받았을 땐 얼마나 슬프고 외로운 마음이 들까. 덜컥 겁이 난다. 인간관계와 별개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고 싶겠지만 결국 모두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다음 해 생일이 돌아오기 전까지 높은 성적을 유지하려 주변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며 소통에 더욱 힘써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내 앞길 헤쳐가느라 바쁘고 때로는 추악한 본모습을 내보이게 될 수도 있을 텐데….

아마 내년의 인간관계 성적표는 더욱 낮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다.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생일 케이크를 일곱 개나 받았다며 거짓으로 자랑한 친구를 한동안 부러워했던 적도 있었지. 연연하고 싶지 않으나 들춰볼 수밖에 없는 이 시험날, 내년의 나는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궁금하다. 고마운 마음들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되, 타인의 관계와는 별개로 스스로를 진정으로 축하하고 아낄 수 있도록 내면의 성장도 이루어야 떳떳한 마음으로 성적표를 받아 들 수 있을 것이다. 벌써 떨려. 그렇지만 이번 생일 정말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당신의 축하에 행복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