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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강아지는 시내버스에 탑승할 때 후불교통카드를 찍지 않는다. 티머니카드도, 현금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 귀하게 가방에 모신 뒤 함께 탑승한다. 이 때 이 가방이 문제가 된다. 시내버스 운송사업 약관 제3장 운송책임 제10조에 따르면 사업용 자동차를 이용하는 여객은 동물을 차내에 가지고 들어가서는 아니 된다. 다만 장애인 보조견 및 전용 운반상자에 넣은 애완동물은 제외한다. 생활법령정보는 반려동물의 크기가 작고 운반용기를 갖춘 경우에만 탑승을 허용한다고 안내한다. 이 전용 운반상자 및 운반용기의 정의는 누가 내리는가? 재질과 규격을 별도로 안내하지 않는 이 허술한 약관 덕에 버스기사와 승객의 실랑이가 벌어지게 된다. 우리 멍멍은 내 머리통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적은 양의 털을 흘리는 푸들이다. 검은 ..
속한 모든 집합에서 벗어나고 싶다.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깊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 현대인의 미덕이라 여겼다. 괜히 사적인 연을 이어나가려 했다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 걱정도 했다. 그런데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함께 돈도 벌고 프로젝트도 이뤄나가고 있는데, 정으로 만난 사람들에게선 날이 갈수록 뭐 하나 얻어가는 게 없다는 삐딱한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콩고물을 바라며 누굴 사귀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말 할 자격이 없지. 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고 믿어. 함께 있을 때 즐거울 수 있기만을 바랐던 사이에서 왜 즐거움마저 얻을 수 없을까. 스스로를 가엽게 여기는 것만은 징그럽고 짜증나는 일이니까, 시퍼런 칼날 같은 농담으로 바꿔 흔들고 던져버리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싶다. 내 ..
다들 진짜 선배가 있는 걸까. 일본 학원 만화에서나 보던 그 단어. 내 인생에서는 쓸 일이 없었다. 엣센스 국어사전에서는 선배 先輩를 ‘1.같은 분야에서 학문·경험·연령 등이 나보다 많거나 나은 사람, 2.자기의 출신 학교를 먼저 졸업한 사람’이라는데, 역시 떠오르는 얼굴이 없다. 혹시 내가 지금껏 이 모양 이 꼴인 게, 변변한 선배가 없어서?! 나보다 어리고 경력이 짧은 사람의 실수는 대수롭지 않은 데 비해 연장자의 실수나 못난 모습은 유독 거슬린다. 존댓말 듣고 반말하는 사람이 그런 대접 받을 만한 행동거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내 눈빛은 오랜 재판에 지친 배심원의 그것이 되어버린다. 또 연장자 눈에 잘 보이려 고민하는 것보다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의 평가를 듣는 데 더 신경 쓰곤 한다. 연장자나 선배..
얼굴은 당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마에서부터 눈썹, 눈매, 콧대, 뺨, 입술, 턱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생겼는지 살피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인생을 점칠 수 있다는 말이다. 비록 내 이 분야의 배움이 짧고 경력이 미천하지만 짧게나마 관상에 대해 쓰려하니, 잠시 남자친구의 얼굴을 빌려 예를 들어볼까 한다. 우선 남자친구는 참 잘생겼다. 그 시작은 정갈한 이마에서부터 시작된다. 고르게 솟은 이마는 짙은 머리와 깔끔하게 경계를 이루어 더욱 말갛게 보인다. 이런 이마는 대개 정직하고 허세를 싫어하는 성격이며 아주 내 이상형과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자리에서 솟아난 두툼하고 검은 눈썹은 그 꼬리까지 촘촘하게 자리를 잡았으며 윤기가 흐른다. 이를 통해 요령 피우지 않..
오가는 사람들 옷차림이 두툼하다. 앙상한 가지는 냉정한 바람의 눈을 피해 나뭇잎 몇 개를 숨겨두었다. 손가락은 주머니 깊은 곳에 숨어 두 번 다시 나오지 않기로 다짐했다. 언제부터 개시했는지 모를 붕어빵 장사가 거리 곳곳에서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다. 잡화점들은 앞다투어 크리스마스 카드와 선물하기 좋은 물건들을 가장 눈에 띄는 매대에 진열해두었다. 이런 장면들은 모두 시각을 활용해 계절을 추리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계절은 눈으로 알아보기가 이렇게 쉬운데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 알 수가 없다. 몇 년을 가깝게 지낸 사람이 알고 보니 생명을 얻은 폐기물이었다는 것을 첫눈에 알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운 내면을 갖고 있고 그걸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과거의 당찬..
출근길 버스를 기다리는 아침이었다. 작은 로터리를 둘러싼 가로수 아래로 노란 점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걸 보고 있자니 고등학생 때가 떠올랐다. 반 애들이 쉬는 시간에 우르르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더니 교정의 은행나무 아래를 폴짝거렸다. 떨어지는 이파리를 땅에 닿기 전에 잡으면 대학에 붙는다는 소릴 듣고 그러는 거였다(정민 씨는 이 말을 듣고 추풍낙엽 전형이냐고 했다). 그러고 있을 시간에 공부를 해야 대학에 붙지 않을까?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오늘은 나도 그러고 싶었다. 대학에 또 가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살랑살랑 떨어지는 잎이 갖고 싶었다. 은행나무 아래에서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낙엽은 모기보다 잡기 어려웠다. 속도도 훨씬 빠르고, 무엇보다 방향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왕창 떨어지..
망아지 끼니 챙기기 핸드폰을 켜보니 9시 51분. 요가 수업은 10시부터. 후다닥 나오다가 침실 문 앞에 웅크리고 있던 첫째 고양을 밟을 뻔했다. 바지를 다리에 끼우다 고무 밴드에 발가락이 걸려 비틀거렸다. 열쇠를 챙겨 문밖을 나섰다. 내리막길을 슬리퍼로 짝짝 뛰어 내려가는데 양 볼이 낯설게 상쾌하다. 왔던 길을 도로 뛰어 올라가 현관문을 열고 마스크를 집어 들었다. 다시 내리막길을 짝짝. 3분 거리의 요가원에 도착해 숨을 고르고 자리에 앉았다. 땀을 삐질 흘리며 관절을 어색한 방향으로 꺾는다. 긴 몸뚱이는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엉성하다. 다섯 달째 요가원에 다니고 있는데, 여전히 할라아사나*와 살람바 시르사아사나**가 어렵다. 다른 자세도 어렵지만 이건 나아질 기미가 없다. 언젠가는 되겠지 느긋하게 기..
순백의 산타클로스 영암군의 특산품 광고 모델은 씨름 선수들이었다. 고속버스터미널 승강장 의자에 앉아 11번 게이트 위 커다란 전광판을 넋 놓고 보다가, 웃통을 벗은 채 울룩불룩한 근육을 뽐내는 남자들 덕분에 흠칫 놀랐다. 가슴팍에 무슨 상자를 안고 있었는데 근육을 흘끔거리느라 그 속에 든 게 해삼인지 고구마인지도 보지 못했다. 특산품 광고 모델로 적합한지는 모르겠으나 영암군이 어디에 있는 지는 알고 싶어졌다. 벌써 친구 중 셋이 결혼을 했다. 셋 다 서울 아닌 동네에 살고 있다. 아무래도 집값이 싸야 초혼 연령이 낮아지는 모양이지. 신나서 결혼해놓고 어떻게들 지내는지 궁금하다. 10월, 토요일인 오늘도 네 번째 결혼식에 간다. 예식장에 12시까지 도착하기 위해 출근하는 날보다 일찍 일어났다. 고속버스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