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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0227 월 / 찰스 부코스키 세일즈걸 / 긴개 본문
대학생 때의 나는 찰스 부코스키에 빠져있었다. 1920년 독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미국으로 넘어온 그는 여러 잡일을 전전하며 글을 쓰다 이후 전업 작가가 되었다. 꽤 웃기는 아저씨였는데, 욕도 기똥차게 하고 글도 시원하게 썼다. 다들 쉬쉬하며 뒷골목에 보이지 않게 쑤셔 박아두는 쓰레기 같은 사람이었다. 성숙한 십 대라면 부코스키를 한두 장 넘겨봐도 된다. 이십 대라면 푹 빠져들 법하다. 그러나 삼십 대 이후에 부코스키를 미친 듯이 사랑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좀 멀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당시의 내가 알던 사람 중에 유일하게 어른 대접을 해줄 만한 사람은 찰스 부코스키가 유일했다.
어린 시절 나는 어른의 판단은 대개 선에 기초하리라고 믿었다. 전체 인구 중 악인은 소수이고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악인이 되었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뉴스와 주변 어른들을 보며 어딘가 찜찜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직접 스무 살이 되고서야 역시나 나이와 선악의 관계는 허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이는 그냥 저절로 들었을 뿐이다. 늙는다고 해서 나쁘거나 좋지도 않았다. 선과 악도 구분하기 어렵다. 치사한 사람도 있고 추잡한 사람도 있다. 비겁한 사람, 멍청한 사람, 무례한 사람, 그러면서도 주변 사람은 알뜰히 챙기는 사람,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저주를 품는 사람 등 선과 악이 전부 뒤죽박죽이었다. 흑백논리는 쉽다. 둘 중 하나를 고르면 그만이다. 하지만 세상사를 파악할 때 주어지는 선택지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겨우 몸만 성인이 되었던 나는 어디 가서 말하긴 부끄러운, 그러나 속으로는 온통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느닷없이 홀로 사회에 나동그라져 이정표의 글씨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이방인 같은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당시에는 도대체 뭘 위해 대단하지도 않은 어른들의 말을 진지하게 귀담아 들었던 건지 허무해져서 진이 죽 빠졌다. 어른은 뭘까, 그들이 그렇게 등 떠밀어 보낸 대학은 뭘까, 나는 이제 어른인가, 이다음엔 무엇을 해야 할까 등의 의문은 이십 대 초반이라면 으레 떠올릴 만한 것이었으나 당시 혼자였던 나는 누구에게도 쓸만한 조언을 듣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까지 읽고 있던 책이나 만화, 영화들도 비슷했다. 내 편이 되어주는 좋은 사람과 정의롭게 무찔러야 할 나쁜 사람, 착한 주인공이 등장했다. 세상의 복잡 미묘한 맛을 끈질기게 다루는 대신, 부족한 개연성을 선善으로 해결하는 단순한 전개가 많았다. 그런 이야기만 접하며 자라난 나는 만만해 보이지 않으려 냉소로 무장했지만 사실은 그저 입력된 대로 행동하는 멍청이였다.
부코스키의 『팩토텀』을 읽게 된 경위는 생각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책들이 그랬듯 우연이었을 것이다. 주인공은 쓰레기다. 죽도록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며 여자를 때릴 때도 있다. 성실하지도 않고 그러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되는 대로 살며 그게 뭐가 나쁘냐고 되묻는다. 결국 다들 되는 대로 살고 싶어서 이 모든 고통을 감수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기심에서 우러나온 사람들의 행동을 예쁜 포장지로 감싸는 짓은 하지 않는다. 더러운 것을 더러운 대로 직시하는 시선에는 망설임이 없다. 어설픈 동화 속에 살던 나의 뿌리를 뒤흔드는 이 잡역부의 관점은 충격적이고도 즐거웠다. 누구나 살다 보면 자신 만의 빨간 알약이 되어주는 작품을 만날 텐데, 내게는 찰스 부코스키가 그러했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다. 그건 놀랄 일이 아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생각을 하고 도저히 엄두도 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이라고 해서 꼭 악하다고 할 수도 없다. 내가 선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도 악하지 않다. 게다가 모두가 눈을 피할 때 혼자 남을 돕기 위해 나설 때도 있다. 평소 아끼던 이를 위해서가 아닌, 그저 타인에게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때로는 굳은 어깨를 좀 풀고 배짱을 부릴 줄도 알아야 한다. 혼자 눈물 짜며 약한 소리 하지 말고 거칠더라도 나를 지키는 방법쯤은 배워야 하는 것이다. 세상이 만만하진 않지만 나 역시 그렇다는 기세가 있어야 한다. 살아 있는 누구도 내게 이런 류의 가르침을 준 적은 없었다. 찰스 부코스키는 어른이었다. 꽤 쓸만한 소리를 하는.
대학생 때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교양수업이었던 ‘문학과인생’ 첫 시간에 교수님은 ‘내 인생의 문학에 대해 발표하기’라는 과제를 내주셨다. 다음 시간에 발표할 수 있도록 간단한 소개를 준비하라는 말씀에 나는 주저 없이 『팩토텀』을 골랐다. 이 책과 부코스키에 빠지게 된 이유를 구구절절 적은 뒤 발표시간을 기다렸다. 어서 빨리 좋아하는 책을 널리 소개하고 이런 책을 골라온 나에게 우쭐해하고 싶었다. 그런데 손꼽아 기다렸던 그 시간에 경악스럽게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어린 왕자』를 인생 문학이라며 소개했다. 어떻게 살면서 읽은 것 중 가장 인상 깊은 책이 『어린 왕자』일 수 있는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한 명이면 모를까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생텍쥐페리의 망령에 홀려있다니 내가 시류를 읽는데 실패한 것인지, 주입식 교육의 여파로 대학가의 능동적 독서 풍토가 멸망해 버린 것인지 그야말로 아찔하고도 통탄스러웠다. 학우들이 소개한 책 중 마음에 드는 것을 따라 읽어보리라 생각했던 것도 허사가 되고 말았다. 『어린 왕자』의 감상이라는 것도 ‘감동스러웠다’, ‘인상 깊었다’, ‘와닿는 점이 있었다’ 같은 헛소리뿐이어서 그대로 강의실을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들 이렇게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면 도대체 왜 ‘문학과인생’을 선택한 거야. 대학에서 문학적 교류를 기대하는 것이 이리도 헛되었나.
한편으로는 비통하면서도 동시에 거만한 기분이 들었다. 이놈들아, 책이 뭔지 보여주마. 문학 맛 좀 봐라. 의도적으로 천천히 앞에 걸어 나갔다. 한 손으로 거만하게 책을 들고 흔들며 부코스키의 멋짐을 간단히 설파했다. 그리고 말미에 덧붙였다. 나랑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은 부코스키를 읽고 다시 오라고.
그렇게 발표하고 나서 나는 ‘문학과인생’에서 C+를 받았다. 문학의 맛 어쩌고 떠들어놓고서 강의는 전부 제끼고 놀러다닌 덕분이었다. 진단서를 겨우 제출해 출석일수를 채우고 기말고사를 치를 땐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교수님께 감사하다는 편지 따위를 시험지에 끄적거리고 말았다. 편지지 같은 시험지를 제출하고 강의실을 나서는데 누군가 나를 불러세웠다. 덕분에 부코스키 읽었다고. 정말 재미있었다고. 나는 씩 웃고는 도망치듯 건물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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