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220117 월 / 양반은 뛰지 않는 법 / 긴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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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7 월 / 양반은 뛰지 않는 법 / 긴개

긴개 2022. 1. 17. 23:09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다짐했다. 두 번 다시 일찍 일어나지 않겠다고. 새벽 1시가 넘어 잠들고 아침 6시에 일어나 8시에 등교하는 수험생 생활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공부엔 불만이 없었는데 잠을 재우지 않는 사회는 싫었다. 간첩 고문하는 것도 아니고 왜 잠을 못 자게 해. 잠이 부족해서인지 스트레스 때문인지 유독 고등학생 시절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 대학생이 되고 첫 학기 시간표에 월화목금 1교시를 넣는 클래식한 우를 범해버렸다(1학년 기초 수업이 대부분 1교시에 시작하기도 했고). 덕분에 출근길 직장인들이 마귀의 얼굴로 들끓는 1,2호선에 매일같이 발을 들여야 했다. ‘1호선-신도림-2호선’ 구간에는 또 어찌나 광인의 밀도가 높았던지. 이 구간 어딘가에 그런 사람들이 함께 모여사는 동네가 따로 있을 거라 굳게 믿을 정도였다.


지하철을 빠져나와 오르막길을 15분 정도 오르고 나면 겨우 건물 1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좁아터진 교내 엘리베이터는 한 번에 한 스푼의 학생들만 나를 수 있었다. 차라리 땡볕 아래에서 놀이기구 탈 차례를 기다리고 싶었다. 등록금을 생각하면 강의나 교수도 시원찮았다. 점점 등교 시간만 되면 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원하는 시간에 일어나 아무 때나 등교하기 시작했다.


강의를 들으러 학교에 가는 게 아니라, 그냥 학교에 가기 위해 학교에 갔다. 학교 앞 횡단보도를 질주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아주 천천히 걸었다. 양반은 뛰지 않는 법이라고 혀를 끌끌 차면서. 다급해 보이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감상하다 보면 강의실에 들어갈 기분이 들지 않았다. 봄의 교정에는 신입생만큼 연둣빛 새싹이 가득했고, 작은 연못의 분수가 졸졸 물을 튀기면 참새들이 포르르 주변을 날았다. 아무 데도 가지 않는 순간이 되어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프리한 순간이 모여 성적표의 F가 되었고, 신입생의 일탈은 그 길로 뜻밖의 여정이 되었다(그야말로 졸업까지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지난주 내내 이불속에서 나오기를 미루고 미루다가 지각의 마지노선이 되어서야 몸을 일으키고 택시를 잡아 출근했다. 등교하기 싫었던 학생은 그대로 출근하기 싫은 직장인이 되었다. 그러나 어디로든 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동하지 않는 사람은 대접받지 못한다. 1인분의 몫에는 이동이 포함되어 있다. 이동권이 박탈된 사람들의 분노도 이 때문일 것이다. 집에서 학교로, 직장으로, 다시 집으로, 다시 어딘가로 이동해야만 한다. 아무 데도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죽기 전까지 아마 그래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