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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0207 월 / 가장의 뒤늦은 메타인지 / 긴개 본문
혼자 점심을 먹으면 반 공기를 남긴다. 퇴근 즈음엔 허기에 사로잡힌다.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는다. 집에 돌아가 멍멍이 산책 후에 저녁을 먹으려면 두 시간은 지나야 한다. 그때까지 못 기다려. 이른 저녁을 배달시켜 허겁지겁 먹었다. 몇 입 삼키기도 전에 가슴이 턱 막힌다. 먹은 그릇을 씻는 도중에 몇 번이고 가슴을 쳤다. 보안키를 찍고 회사를 나와 곧바로 편의점에 갔다. 까스활명수 한 병에 천 원. 편의점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전부 들이킨다. 병은 길가 전봇대 아래에 쌓인 분리수거 봉투에 쏙 집어넣었다. 답답한 가슴은 뚫릴 기미가 없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멍멍이랑 오십여 분을 걸었다. 나는 죽상인데 멍멍이는 신나서 히히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남산 아래도 돌고 전망대도 다녀왔다. 그제야 먹은 게 조금씩 내려간다. 돌아오는 길엔 카페에서 청포도 에이드도 테이크 아웃했다. 돈을 주고 이런 걸 다 사 먹어보네. 춥지도 않아 쑥 들이켰다. 밥 말고 음료수나 사 마셔야 하는 걸까. 나이 먹은 실감이 난다.
꼭꼭 씹어먹어야지. 별 수 있나. 까먹지 말고 꼭꼭 씹어먹어야지. 어떻게 하면 안 까먹을까. 천천히 꼭꼭 달게 씹어먹을 때마다 끼니 통장에 누가 도장을 찍어줬으면 좋겠다. 왜 초등학생 때 독후감 쓰면 주는 독서 통장 같은 거 있잖아. 기뻐하는 혀와 위장 그림이 페이지마다 들어찼으면 좋겠다. 핸드폰 애플리케이션 말고 종이 통장에다가. 잉크가 마르는 순간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도장을. 운동 통장도 있으면 좋겠네. 바빠 죽겠는데 요가 빼먹지 않은 날, 소리도 시원하게 쾅 도장을 찍어줬으면 좋겠다. 왜 담요 위에서 화투 칠 때 패를 잘 때리면 진짜 시원한 짝 소리가 나잖아. 그것처럼 도장도 종이에 모든 면이 착 닿으면서 깔끔하게 쾅 소리가 났으면 좋겠다. 에세이 통장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중에 결혼할 사람한테 지금까지 모은 통장을 쫙 보여주는 거지. 변변찮지만 이 정도 모아 왔다고. 그럼 결혼은 못하겠지만.
나는 가장이네.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가장이야. 딸린 입이 셋이다. 네발짐승 셋에 나까지 먹여 살리려면 딸린 입이 넷이라고 해야 하나. 방금까지 좀 지쳐 있었는데, 내가 가장이라고 말해보니 좀 으쓱해진다. 가장은 멋진 거잖아. 날 믿는 것들을 위해 책임지고 최선을 다하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 출근해 농땡이 피운 것이 좀 부끄럽기도 하고 소년 만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기도 하고 그래. 편의점에서 파스랑 담배도 사 올 걸 그랬나 싶고.
나는 유기된 인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가장이었네. 숫자는 없고 도장만 가득한 통장을 갖고 싶어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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