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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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4 월 / E의 A에게 / 긴개

긴개 2022. 2. 14. 21:53

 

 



 손편지 보내게 주소 좀 알려달래도 자꾸만 카카오톡으로 불쑥 말을 거는 영국의 친구야, 나는 애인이 아니면 도통 메시지를 주고받지 않는다. 오만 애들과 하루 종일 카톡으로 떠들던 이십 대 초반으로는 영영 돌아갈 수가 없어. 수업시간 내내 쓴 편지를 쉬는 시간에 친구와 교환하고 또 수업시간 내내 그 답장을 쓰고, 학원에 가서도 마저 쓰던 중학생의 나는 지금의 나를 보면 실망할지도 몰라. 얼굴을 보고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 사이의 물리적, 시간적 거리를 좁히고 싶은 마음은 내게도 있어. 그 방법을 다르게 생각할 뿐이지. 우선 서로의 일상을 곁눈질로라도 체크할 수 있는 SNS도 좋아. 네가 있는 곳에서 보고 듣는 것들을 이미지와 텍스트로 모아놓으면 바쁜 날엔 하트만 대충 누를 수도 있지만 어떤 날엔 댓글을 남길 수도 있지. 있어보이려 아둥바둥 노력하는 게시물은 우리 둘 다 피할테니 재미있을 것 같아. 그런데 SNS는 싫다니 아쉽다. 

 

 

 그렇다면 손편지를 쓰면 어떨까 했거든. 편지만 넣으면 허전하니 우리 강아지 쉬가 묻은 나뭇잎을 봉투에 함께 넣을 수도 있고, 재미있는 스티커를 넣을 수도 있지. 너는 여왕의 머리카락을 넣을 수도 있고, 훌리건 앞니를 모아 보낼 수도 있지. 그런데 도통 주소를 알려주질 않네.

 

 

 애인과의 메시지는 쉬워. 지금쯤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거든. 그럴 때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도 알지. 요즘 어떤 고민이 있는지, 먹고 싶은 건 뭔지도 알아. 서로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더니 점점 대화가 편해. 이제는 어떤 주제로 말을 걸어도 서로의 맥락에 맞춰 대화할 수 있어. 또 내가 갑자기 쓸쓸해지거나 골치 아픈 일에 의견을 듣고 싶을 때 곧바로 연락할 수도 있지. 서로의 일상을 클라우드 공유하듯 실시간으로 동기화를 해두었더니 이 사람하고만 말을 하게 돼. 이러다 애인이 없어지면 어디에 연락하나. 겁나. 

 

 

 만약 갑자기 쓸쓸한 기분이 들거나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면 차라리 곧장 본론을 말해줘. 안부 묻기는 건너뛰고 진짜 생각들만 전해줘. 그러면 나는 빠르게 몰입할 수 있어. 하고 싶은 말 위로 수많은 아무 말들이 덧씌워지면 대화에 집중하기가 어려워. 이래서 따로 연락하는 친구들이 적어지나 봐. 하나마나한 말들을 하기 싫어서 자꾸 말을 씹었더니. 흐흐.

 

 

 학교 다닐 땐 SNS가 없어도 만나서 이야기하며 서로의 일상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젠 전부 각자의 시간과 공간이 있지. 한 명 한 명의 일상을 확인하려고 따로 시간 내기도 힘들어. 그렇다고 영영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야. 그래서 다들 SNS로 그 노력을 대신하나 봐. 나는 카카오톡보다는 인스타그램이 편하긴 한데, 제대로 대화할 거라면 장문의 편지가 더 좋아. 시간을 들여 생각하고 대답하고 싶어. 

 

 

 내 친구가 한국 이외의 곳에서 살고 있다니, 1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도 신기하고 이상해. 그곳 생활을 잘 좀 전해줘 봐, 이런 낯선 기분을 없앨 수 있게. 그 동네에서 어떤 음식을 잘 먹는지, 어떤 맛인지, 왜 좋아하는지 좀 구체적으로! 거긴 영국이니까 반대로 말해줘도 좋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가까운 사이가 되려면 서로의 에피소드들을 계속 연재하는 수밖에 없어. 구체적이고 솔직한 이야기들. 이런 대화를 어딘가에 같이 모아놓아도 재밌겠다. 그러면 다시 만났을 때 할 말이 더 많아지겠지? 한 번 고려해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