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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1-2023 긴개 (330)
성북동 글방 희영수
일본 사람들은 자전거를 많이 타더라. 봉미선 씨가 자전거 뒷자석에 짱구를 태우고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건 자전거를 유달리 좋아해서 그런줄 알았지. 오사카에 갔더니 글쎄 어디든 자전거를 탄 사람이 있더라. 평화롭지만 어딘가 이질적인 풍경. 그러고보니 한국처럼 쫄바지에 헬멧을 쓰고 고글을 낀 무리가 없었다. 정장 차림의 회사원, 원피스를 입은 사람, 식료품을 바구니에 담고 지나가는 사람. 전부 일상복 차림이었다. 졸릴 듯 평온하지만 묘한 분위기는 이것 때문이었나. 돌이켜보면 최근 한국에서 유행했던 말, ‘자라니(자전거와 고라니의 합성어)’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요즘은 자전거 하나로도 그 사람의 많은 걸 추측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지역마다 공공자전거 시스템이 생겨 근거리를 이동하는 시민들에게 소소한 즐거움과 ..
나를 해치려는 것들을 모두 꼬챙이에 꿰어 전시하고 싶을 때가 있다. 죄인의 머리를 저잣거리에 내걸듯, 괘씸한 마음을 먹은 놈들은 이리 될 것이라는 경고를 하고 싶었다. 요즘은 그렇게 할 수 없지. 현대식으로다가 SNS 피드에 이것들 사진을 올려 버려? 아니면 지명수배자 전단지처럼 얼굴을 한 데 모아 티셔츠에 인쇄한 다음 일 년 내내 입고다녀? 복수하는 상상은 점점 장황해져 티셔츠 제작을 위한 펀딩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모습까지 이어졌다. 후원자에게 리워드로 때까치 뱃지를 드릴까? 때까치가 사냥한 동물들을 나뭇가지에 꽂아두는 습성이 있으니까 마스코트로 딱이지. 펀딩이 성공하면 때까치 후원자들과 다같이 엠티도 가야지. 밤엔 불 피운 주위에 둘러앉아 꼬챙이에 소세지랑 떡도 꽂아먹고, 디저트로 마시멜로까지 꽂아먹..
친구가 온라인 쇼핑몰을 열었다기에 들어가보니 이미 많은 상품이 품절된 후였다. 오픈하자마자 들어온 건데 어떻게 벌써 팔렸지? 몇만 명의 팔로워가 있는 인플루언서나 되어야 완판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은가? 의아해하던 중에 어떤 분이 그런 품절 전략이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인기가 없던 브랜드라도 품절된 상품이 많은 척하면 사람들이 그걸 사고 싶어 사이트를 들락날락하게 된다는 전략. 정말 그래서일까? sold out 회색딱지가 붙은 옷들은 그렇지 않은 옷보다 내게 더 잘 어울릴 것 같고, 저 옷이 없으면 당장 내일부터 입고 나갈 옷이 없을 것만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이. 친구네 사무실에 직접 쳐들어가서 저 옷을 뭉텅이로 훔쳐 나와야만 발을 뻗고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이 드는 ..
어른의 간식 담배, 그거 맛있습니까? 백해무익한 독입니다 독. 이렇게 말하는 나는 끊었습니다. 어때요 한 마디 할 자격 있지요? 독하게 마음 먹고 끊은 건 아니랍니다. 그냥 옷과 머리칼에 냄새가 배고 가래가 생기는 게 싫어서 더 피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남자친구한테 비흡연자인척 했거든요. 거짓말하면 귀찮으니까 끊기로 했습니다. 안 피운 지 일 년이 넘었습니다. 옆에서 누가 피워도 안 땡깁니다. 사실 원래도 많이 안 피웠습니다. 한 달에 한 갑? 비흡연자는 아니고, 반흡연자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담배는 왜 피웠던 걸까요. 들이마시면 목을 턱 조이는 연기와 길게 내쉬는 숨이 하얗게 퍼져가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친구가 피워서 따라 피웠나? 아빠가 피우니 따라 피웠나? 왜 그랬을까. 어른의 간식 술..
내가 또 배달음식을 먹으면 30만 원을 환경단체에 기부하겠다. 이 말을 인스타그램에도 올려놓고 주변에도 널리 알려서 아주 억지로라도 지키게 해야겠다. 4.8이라는 높은 평점의 퓨전양식점. 리뷰를 쭉 훑어 보니 ‘ㅠㅠㅠㅠㅠ’ 만발, ‘사장님 적게 일하고 많이 버시라’ 일색. 출출한 저녁, 요리할 시간은 없고 있어도 하기 싫으니 21,000원 짜리 파스타에 배달비 2,900원까지 해서 23,900원을 배달앱으로 결제했다. 도착 후 젓가락을 들고 신나게 덤볐다가 세 입을 먹고 내려놓았다. 이걸 먹고 눈물 흘린 고객들, 이런 음식을 돈 받고 판 사장, 이걸 돈 주고 산 나. 셋 중에 누구를 고소해야할 지 모르겠다. 배달 온 음식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 버릴 생각을 하니 지구와 통장에게 한 번씩 큰 절을 해..
강아지는 시내버스에 탑승할 때 후불교통카드를 찍지 않는다. 티머니카드도, 현금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 귀하게 가방에 모신 뒤 함께 탑승한다. 이 때 이 가방이 문제가 된다. 시내버스 운송사업 약관 제3장 운송책임 제10조에 따르면 사업용 자동차를 이용하는 여객은 동물을 차내에 가지고 들어가서는 아니 된다. 다만 장애인 보조견 및 전용 운반상자에 넣은 애완동물은 제외한다. 생활법령정보는 반려동물의 크기가 작고 운반용기를 갖춘 경우에만 탑승을 허용한다고 안내한다. 이 전용 운반상자 및 운반용기의 정의는 누가 내리는가? 재질과 규격을 별도로 안내하지 않는 이 허술한 약관 덕에 버스기사와 승객의 실랑이가 벌어지게 된다. 우리 멍멍은 내 머리통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적은 양의 털을 흘리는 푸들이다. 검은 ..
내가 만들 가족에는 반장 제도가 있다. 반장은 가족 회의를 주관하고 집 게시판을 관리할 수 있다. 가족 회의에서는 간식 메뉴라던지 주말에 보러갈 영화 같은 중대 사항을 논의하거나 각자의 스케줄을 발표하고, 새로 사귄 친구를 소개할 수도 있다. 집 게시판에는 가족들이 먹고 싶은 메뉴 후보가 붙어있고, 건의사항, 이를테면 화장실 휴지를 다 쓰고 새 것으로 바꿔놓지 않는 비양심 구성원에 대한 성토가 붙어있다거나 다음 반장은 이러저러한 사람이 뽑혔으면 좋겠다는 체제 전복적인 궁시렁도 붙을 수 있다. 반장은 두 달씩 돌아가며 맡는다. 반장은 임기 동안 한 가지 규칙을 제정할 수 있다. 반장의 기분에 따라 두 달 동안 노란 양말을 신어야 할 수도, 매일 콧구멍 사진을 찍어야 할 수도 있다. 반장의 규칙이 얼토당토 ..
손편지 보내게 주소 좀 알려달래도 자꾸만 카카오톡으로 불쑥 말을 거는 영국의 친구야, 나는 애인이 아니면 도통 메시지를 주고받지 않는다. 오만 애들과 하루 종일 카톡으로 떠들던 이십 대 초반으로는 영영 돌아갈 수가 없어. 수업시간 내내 쓴 편지를 쉬는 시간에 친구와 교환하고 또 수업시간 내내 그 답장을 쓰고, 학원에 가서도 마저 쓰던 중학생의 나는 지금의 나를 보면 실망할지도 몰라. 얼굴을 보고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 사이의 물리적, 시간적 거리를 좁히고 싶은 마음은 내게도 있어. 그 방법을 다르게 생각할 뿐이지. 우선 서로의 일상을 곁눈질로라도 체크할 수 있는 SNS도 좋아. 네가 있는 곳에서 보고 듣는 것들을 이미지와 텍스트로 모아놓으면 바쁜 날엔 하트만 대충 누를 수도 있지만 어떤 날엔 댓글을..
혼자 점심을 먹으면 반 공기를 남긴다. 퇴근 즈음엔 허기에 사로잡힌다.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는다. 집에 돌아가 멍멍이 산책 후에 저녁을 먹으려면 두 시간은 지나야 한다. 그때까지 못 기다려. 이른 저녁을 배달시켜 허겁지겁 먹었다. 몇 입 삼키기도 전에 가슴이 턱 막힌다. 먹은 그릇을 씻는 도중에 몇 번이고 가슴을 쳤다. 보안키를 찍고 회사를 나와 곧바로 편의점에 갔다. 까스활명수 한 병에 천 원. 편의점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전부 들이킨다. 병은 길가 전봇대 아래에 쌓인 분리수거 봉투에 쏙 집어넣었다. 답답한 가슴은 뚫릴 기미가 없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멍멍이랑 오십여 분을 걸었다. 나는 죽상인데 멍멍이는 신나서 히히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남산 아래도 돌고 전망대도 다녀왔다. 그제야 ..
내 강아지는 겁이 많다. 빗방울이 덤불 위로 투둑, 우비 위로 투둑 떨어지는 소리에 매번 깜짝 놀라는 바보 란마. 그러나 비가 와도 산책은 꼬박꼬박 가셔야 하는 성실한 우리 멍멍이. 이렇게 심약한 멍멍구에게는 노즈워크 장난감을 추천한다. 사람보다 후각이 발달한 개는 장난감 속에 숨겨진 간식 냄새를 코로 쫓으며 스트레스를 풀고 자신감을 얻고 어쩌구 한다니 당연히 사줘야지. 영하의 날씨에 산책을 나섰다가 애견용품점을 발견하고 뒷걸음치는 어른 개를 설득해 밝고 따뜻한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님이 추천한 노즈워크 장난감 중 삑삑 소리가 나지 않으며 빠르게 이리저리 구르지 않는 걸 고르고, 강아지 전용 땅콩버터와 전용 패드도 샀다. 분리불안이 심한 강아지에게 외출 시 주면 좋은 이 땅콩버터는 성분도 안전하고 한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