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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1-2023 긴개 (330)
성북동 글방 희영수
천국은 아마 사람과 사람이 물 흐르듯 어렵지 않게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곳일 거야. A를 말하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A로 들어주고, 고맙다 말하면 정말 고마운가 보다 하고 들어주는 곳. 대화하면 할수록 응어리가 풀리고 타인과 나의 경계가 부드럽게 허물어지는 곳. 내가 사는 세상은 그 반대야. 말은 의도하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해. 이렇게 오류가 많은 전달 시스템이 왜 아직도 주요하게 쓰이는지 신기할 따름이야. 말이 웃음을 빚고 마음도 전하려 했지만 어쩐지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지.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 시절도 있었다던데. 세상의 모든 균열이 말로부터 나왔다면 우리의 입은 성인식 때 꿰매져야 해. 책임도 지지 못할 말들을 눈보라처럼 퍼트려 놓고 정작 난처할 땐 뒷짐만 진다고. 그런 허풍선이는 대..
그 촌 동네에서 외할아버지는 매끈한 빽구두를 신고 다녔다. 마을에 티비도 몇 개 없던 시절에 돈을 내고 춤도 배우러 다녔다. 그동안 외할머니들은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고 밤나무도 길렀다. 아들 셋, 딸 둘에 남편까지 먹여 살리려 양계장을 치고 쌀집을 열고 월세방을 굴렸다. 아스팔트도 없던 흙길을 흰색 양복 차림으로 순회하던 할아버지는 학비가 아깝다고 엄마의 고등학교 입학을 반대했다. 이모의 도움으로 입학은 겨우 했지만 교통비 타낼 곳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엄마의 결혼식에도 한 푼 보태지 않았다. 그 답례로 엄마 역시 할아버지 장례식에 눈물 한 방울 보태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모르고 있었다. 두 번째 할머니가 어디엔가 살아계신 것도 잊었다. 근데 할아버지 장례식에 왜 나를 안..
의자에 앉아 핸드폰 화면만 엄지로 밀고 당긴 게 벌써 한 시간째이다. 무기력한 이 모습은 바로 우울의 신호지. 우울하다고 행인에게 새총을 쏘거나 횟집 물고기를 훔치지 않는 고도로 사회화된 나를 칭찬한다. 술에 취해 운전하거나 사람을 괴롭히는 건 감형받지만, 우울하다고 그런 행동을 해선 안 된다. 행인들 주머니에 쓰레기를 넣어도 안 된다. 우울한데 좀 봐주면 안 되나? 안된다. 이럴 때일수록 귀부인의 몸가짐이어야 한다. 나는 지금 귀부인. 나는 지금 귀부인. 마음의 평정을 찾고 싶을 때 성숙한 사람들은 요가를 한다. 오전 열시 반에 매트 위에서 다리를 머리 뒤로 넘기며 땀을 좀 흘렸다. 이럴 때일수록 식사도 신경 써야지. 맛있는 과일 샐러드에 치즈빵을 먹었다. 스스로 깨끗이 씻겨놓았다. 무릎에 앉은 고양도..
병 씨 성을 갖고 태어났더라면 꼭 등단해서 시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터뷰 하러 온 기자가 민망한 표정으로 나를 ‘병 시인님-’하고 부르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볼거다. 그러나 한국에 병 씨는 없으니 변 씨로 타협하겠다. ‘변 시인님-’하고 부르는 사람들이 움찔움찔 웃음을 참는 모습을 보고싶다. 다른 성 씨는 재미가 없다. 나 대신 변 씨 성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장래희망으로 시인을 고려해주었으면 한다. 주인공이 까마득히 높게 날았다가 로켓처럼 빠르게 콘크리트 바닥으로 주먹을 내리꽂는 히어로 영화를 좋아하는 내가 어쩌다 *을 보았다. 주인공은 패터슨, 버스 기사이다. 퇴근할 때 버스가 배트카처럼 변하지도 않고, 마지막에 내리는 승객을 연쇄 살인하지도 않는다. 놀라운 운전 실력을 살려 투잡을 뛰지도 않는..
출근길 버스를 기다리는 아침이었다. 작은 로터리를 둘러싼 가로수 아래로 노란 점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걸 보고 있자니 고등학생 때가 떠올랐다. 반 애들이 쉬는 시간에 우르르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더니 교정의 은행나무 아래를 폴짝거렸다. 떨어지는 이파리를 땅에 닿기 전에 잡으면 대학에 붙는다는 소릴 듣고 그러는 거였다(정민 씨는 이 말을 듣고 추풍낙엽 전형이냐고 했다). 그러고 있을 시간에 공부를 해야 대학에 붙지 않을까?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오늘은 나도 그러고 싶었다. 대학에 또 가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살랑살랑 떨어지는 잎이 갖고 싶었다. 은행나무 아래에서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낙엽은 모기보다 잡기 어려웠다. 속도도 훨씬 빠르고, 무엇보다 방향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왕창 떨어지..
망아지 끼니 챙기기 핸드폰을 켜보니 9시 51분. 요가 수업은 10시부터. 후다닥 나오다가 침실 문 앞에 웅크리고 있던 첫째 고양을 밟을 뻔했다. 바지를 다리에 끼우다 고무 밴드에 발가락이 걸려 비틀거렸다. 열쇠를 챙겨 문밖을 나섰다. 내리막길을 슬리퍼로 짝짝 뛰어 내려가는데 양 볼이 낯설게 상쾌하다. 왔던 길을 도로 뛰어 올라가 현관문을 열고 마스크를 집어 들었다. 다시 내리막길을 짝짝. 3분 거리의 요가원에 도착해 숨을 고르고 자리에 앉았다. 땀을 삐질 흘리며 관절을 어색한 방향으로 꺾는다. 긴 몸뚱이는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엉성하다. 다섯 달째 요가원에 다니고 있는데, 여전히 할라아사나*와 살람바 시르사아사나**가 어렵다. 다른 자세도 어렵지만 이건 나아질 기미가 없다. 언젠가는 되겠지 느긋하게 기..
순백의 산타클로스 영암군의 특산품 광고 모델은 씨름 선수들이었다. 고속버스터미널 승강장 의자에 앉아 11번 게이트 위 커다란 전광판을 넋 놓고 보다가, 웃통을 벗은 채 울룩불룩한 근육을 뽐내는 남자들 덕분에 흠칫 놀랐다. 가슴팍에 무슨 상자를 안고 있었는데 근육을 흘끔거리느라 그 속에 든 게 해삼인지 고구마인지도 보지 못했다. 특산품 광고 모델로 적합한지는 모르겠으나 영암군이 어디에 있는 지는 알고 싶어졌다. 벌써 친구 중 셋이 결혼을 했다. 셋 다 서울 아닌 동네에 살고 있다. 아무래도 집값이 싸야 초혼 연령이 낮아지는 모양이지. 신나서 결혼해놓고 어떻게들 지내는지 궁금하다. 10월, 토요일인 오늘도 네 번째 결혼식에 간다. 예식장에 12시까지 도착하기 위해 출근하는 날보다 일찍 일어났다. 고속버스를 ..
흠휼지전 [欽恤之典] 공경할 흠 / 불쌍할 휼 / 갈 지 / 법 전 1. 죄수를 신중하게 심의하라는 뜻으로 나라에서 내리는 은전(恩典). 죄와 벌이 명명백백 가려지는 사회는 없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단 하나의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이 벌어졌다. 목격자들은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았기에 가치관이 다르다. 목격한 장소와 시간이 완벽히 일치하지 않는다. 집중해 포착한 부분이 제각각이다. 정보의 판단도 마찬가지다.
흥망성쇠 [興亡盛衰] 일 흥 / 망할 망 / 성할 성 / 쇠할 쇠 1. 흥하고 망함과 성하고 쇠함. 2. 어떤 사물 현상이 생겨나서 소멸하는 전 과정. 기시감이 드는 설정과 몰입을 깨는 한두 캐릭터가 있더라도 심장 부여잡고 매 화 시청하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저마다의 곤경을 겪으며 현실에서 도망치길 원하는 사람들. 이 때 알 수 없는 인물이 그들의 앞에 등장해 일일이 헤아리기도 힘든 금액의 상금으로 유혹하며 참가를 제안합니다. 사람들은 눈 앞의 괴로움에 덜컥 참가를 결정합니다. 예상치 못한 잔인한 게임에 경악하면서도 머리 위를 떠다니는 현금이 아른거려 벗어나질 못합니다. 캐릭터들은 현실에서도 게임 속에서도 비슷한 흥망성쇠를 경험합니다. 도망칠 수 없고 견디기 힘든 상황임은 비슷하지만 게임에는..
흥진비래 [興盡悲來] 일 흥 / 다할 진 / 슬플 비 / 올 래 1. 즐거운 일이 다하면 슬픈 일이 온다. 2. 세상일은 좋고 나쁜 일이 돌고 돈다는 것을 이르는 말. ↔️ 고진감래 [苦盡甘來] 즐거운 일 뒤에 슬픈 일이 온다니 기분 좋은 사람 겁 주려는 말 같지만, 삶이라는 시스템의 기본 로직 중 하나일 뿐이다. 화려하게 사는 듯 보이는 사람의 삶도 즐거울 수만은 없으며, 유난히 운이 없는 듯한 사람의 삶에도 필히 볕들 날이 있었을 것이다. 이 말을 되새기다 보면 사소한 일에도 일희일비하는 방정맞은 성격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즐거운 일과 슬픈 일이 항상 함께라는 걸 받아들인다면 과거의 기억 중 어느 쪽을 소중히 간직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괴롭기만 했던 것 같은 지난 날들에도 분명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