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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내게 남아있는 동기는 살인 동기뿐. 초-중-고 학교 생활을 거치며 여태껏 연을 이어가는 사람을 꼽자면 한 손으로도 충분하다. 그와 반대로 대학교 동기들과는 졸업 후에도 서로의 안부를 꽤 알고 지낸다. 특수한 진로를 선택할 만큼 비교적 비슷한 시야를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단지 대학생 때부터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인스타그램이 널리 쓰이게 된 덕분일 수도 있다. 그것 이상으로 공들여 주변 사람들 챙기기는 귀찮다. 따로 연락할 필요 없이 좋아요 누르기로 안부를 체크하는 정도가 좋다. 단체 채팅방은 답답하다. 메신저 답변은 겁난다. 꼭 연락을 해야 한다면 언제 어디서 만나자는 구체적인 약속을 잡을 때만 하고 싶다. 게다가 무례하게 구는 사람은 오랜 인연이라도 크게 화를 내고 연락처를 지워버린 탓에 점점 주변이..
미대 입시생 시절엔 다들 한 번씩 기이한 행동을 하곤 했다. 미술대학의 좁은 문틈을 비집고 들어가기 위한 입시의 압박에 돌아버린 것인지, 미술학원에서 30분 간의 쉬는 시간 동안 화장실에 다녀온 다음 끼니를 해결하고 간식까지 구해와야 하는 미션을 매일같이 수행하는 비인간적인 스케줄에 지쳐 돌아버린 것인지 혹은 한국의 수험생이라면 문/이과를 차치하고 누구나 응당 그래야 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나의 경우 수능과 실기의 부담이 끔찍하게 클 때 놀아야 그 재미가 배가 된다는 독창적인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동분서주 놀러 다니며 부모 속을 뒤집어 놓곤 했다. 돌이켜보면 별 것 아닌 일도 그 당시엔 더욱 짜릿하고 즐거웠으므로 그 가설은 나름의 근거를 획득한 셈이었다. 미술학원 시절의 친구 역시 평생 두 번 다시 ..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풋풋한 커플에게는 정확히 언제를 1일로 정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 외에도 중대한 사항이 또 남아있다. 바로 서로를 부르는 애칭을 합의하는 것이다. 여기서 합의라는 단어를 넣은 이유는, 언젠가 나를 느닷없이 공주라 부르던 상대로부터 급격히 애정이 떠나가는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잘 잤나요, 공주님- 에 대단한 악의는 없었지만 그가 머릿속으로 어느 먼 나라에서 왕자와 공주 놀이를 하고 있다는 상상을 하면 여기 이 현실에 발 붙이고 선 나와는 전혀 다른 상대를 만나고 있음이 틀림없으므로 더 이상 교류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말이 그렇게 소름 끼쳤던 이유는, 이전의 연애 상대가 그런 류의 단어로 불리는 것을 즐겼기 때문에 그는 다음 상대인 나 ..
받아 쓰지 않은 말은 주워 담지 않은 곡식 낱알. 부족한 여백에 미처 쓰지 못한 정보를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모래처럼 아쉬워했다. 내게 공부란 쓰는 것. 들깨 같은 글씨는 거대한 수료증의 미세한 조각들. 모아놓고 보면 무수한 그라데이션이지만 등지는 순간 재가 되어 희게 날아간다. PILOT사에서 1994년에 출시한 젤잉크펜 하이테크C(HI-TEC-C)는 청소년 시절 나의 토템*이었다. 연약하지만 우아한 파이프형 팁을 가진 이 펜은 바닥에 한 번이라도 떨어트리는 순간 생명이 끝나버리지만, 귀하게 다루기만 하면 여섯 번째 손가락처럼 나와 촘촘하게 연결되어 세밀한 움직임까지 구현할 수 있는 인체 공학적 기계와도 같았다. 잉크를 남김없이 쓴 검은색 0.3mm 펜만 모아도 작은 박스 하나를 채울 수 있을 정도..
재미있는 대화를 나눌 사람이 줄었다. 몰입의 성과를 빅파이만큼이라도 얻은 사람들은 자기 자랑 읊기에 바쁘고, 삶의 낙이 없는 사람들은 삿갓조개처럼 입을 다물었거든. 떠드는 사람들은 자기가 너무 잘났고 입 다문 사람들은 들어줄 여유가 없으니, 이것 참 팽팽한 줄다리기 같다고 해야 하나 느슨한 컨베이어 벨트 같다고 해야 하나. 떠드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만족할 만한 대화를 올해 몇 번이나 했던가. 대화가 재미있었다면 내가 너무 떠들었기 때문이고, 재미없었다면 나보다 상대가 더 떠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래서 월드컵이 재미있었나 보다. 입 닫고 멍하니 굴러가는 공만 보면 되니까. 메시가 잔디 위에서 공을 차고 뛰는 모습만 봐도 충분하니까. 예전의 대화들이 정말 재미있었나? 혈기 왕성했던 그때 흩뿌렸던 말들..
누가 할머니를 사랑했을까? 아들 다섯에 딸 둘이면 차고 넘치는 장사였다. 그들도 할머니만큼은 아니지만 저마다 충분한 자식을 두었다. 제일 적은 수 둘로 자식들을 계산해도 며느리, 사위까지 더하면 최소 스물여덟 명의 자손을 거느린 셈이다. 그런데 그 많은 피붙이 중 누가 우리 할머니를 사랑했을까? 최초로 인식한 불결은 무엇이었던가. 오물 가득한 기억을 거슬러 오르며 끄집어낸 후보 중 하나는 바로 할머니 집에서였다. 기억 속 할머니 집에는 정원이 있었다. 정원에는 돌로 된 징검다리가 있었다. 뭔가 가득 찬 장독대 여럿도 담벼락을 따라 들쭉날쭉 모여있었다. 집 안에는 2층으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이 있었다. 나는 거대한 악어 인형 위에 앉아 계단 맨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썰매를 타며 내려오곤 했다. 푹신한 악어 ..
인간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사회적 기술 중 가장 까다롭고 미묘한, 그러나 가장 위대하고 필요한 것이 바로 공감이다. 적확한 시각과 좌표에 쏘아 보낸 공감은 기후위기와 전 세계적 냉전으로 인한 멸망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된 인류를 구원할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추락하는 수송기에서 떨어뜨린 핵폭탄이 어쩌다 바닷물 위로 힘차게 뛰어오른 멸치의 세 번째 등뼈만 정확히 파괴하고 사라질 확률처럼, 그것은 도통 일어나기 힘들 것만 같다. 공감은 스스럼없이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그것을 정밀하게 다루는 사람은 드물다. 나라고 다를 바 없다. 우리 애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해서 성적이 안 나왔다는 엄마들 타령이 예부터 전해져 내려오듯, 나는 내가 하고자 하면 누구의 마음이라도 깊게 헤아리고 핀셋으로 콕 괴..
겪어본 적 없는 미래가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내 앞에 도착했을 때 느끼는 이 기시감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불완전한 기억들이 일시적으로 뒤섞여 마치 언젠가의 기분인 듯 위장한다. 나는 현재로부터 어긋난 병뚜껑이 되어 틈새로 물을 모두 흘려버린다. 모두가 침착하게 현재와 융화하고 있다. 정말 그럴까? 도무지 타인의 좌표는 추측하기 어렵다. 튼튼한 동아줄은 지금 이 순간에 찰싹 달라붙어있고, 속이 썩은 동아줄은 카우보이의 손 끝에서 날아 얼간이들을 쏙쏙 끌어낸다. 개척지와 개척지 사이의 황폐한 사막을 구르는 뼈다귀가 바로 내 유골이다. 아주 징그러운 사진을 보았다. 보통은 그런 일이 없다. ‘혐오주의’ 같은 경고가 달린 게시물은 절대 클릭하지 않는 편이거든. 그러나 이번엔 손가락으로 화면을 쓱쓱 쓸어내리다..
쓸 이야기가 없다. 몰아치는 일감을 겨우겨우 쳐내느라 온통 모니터 앞에 붙들려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목요일에는 새를 보러 서울숲에 가긴 했다. 소중한 캠코더 캠브릿지와 조류 도감, 쌍안경을 챙겨 뚝섬역에서 내렸다. 셔츠에 니트 조끼, 재킷 차림으로 새를 보러 간다기엔 꽤 멋을 부린 모양새였다. 그렇지만 새를 사랑한 남자 존 제임스 오듀본 역시 셔츠에 재킷 차림을 하고 있는 초상화를 남겼거든. 내 지론이지만 새 애호가들의 드레스 코드는 클래식해야 한다. 점잖고 근사한, 묵직한 멋을 풍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쌍안경을 들고 어딘가를 급히 살펴보는 모습이 수상해 보이고 만다. 멋 이전의 실용성의 문제로, 멀끔한 의복 차림은 쌍안경을 들고도 주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지 않는 부드러운 방법이 될 수 있다. 게다..
캠코더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양손에 핸드폰과 캠코더를 놓고 저울질해보니 보호케이스를 끼운 아이폰 XR이 더 무거운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한 손으로 쥐기도 편하다. 엄지로 녹화 버튼을 누르고 검지로 사진 촬영을 하거나 줌을 당길 수 있다. 손바닥으로 받치고 나머지 손가락으로 감아쥔다. 투박한 기본 스트랩 덕에 놓치지 않고 손에 걸 수 있다. LCD 패널을 다각도로 회전할 수 있어 낮은 각도로 찍을 때도 장면을 확인하기 편하다. 핸드폰으로 촬영할 때는 손가락이 고생 많았지. 이제 고생 끝, 촬영 시작이다. 출근길에 산을 넘다가 맞닥뜨린 새를 미처 찍지 못하고 날려버린 순간이 많았다. 처음 보는 새가 나타났을 때 쌍안경 초점을 맞추고 핸드폰 카메라를 갖다 대 촬영하는 어설픈 디지스코핑*을 하다 보면 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