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0123 월/ 살인 동기와 두루두루맨 / 긴개 본문

2021-2023 긴개

0123 월/ 살인 동기와 두루두루맨 / 긴개

긴개 2023. 1. 23. 22:18

 

 



 내게 남아있는 동기는 살인 동기뿐. 초-중-고 학교 생활을 거치며 여태껏 연을 이어가는 사람을 꼽자면 한 손으로도 충분하다. 그와 반대로 대학교 동기들과는 졸업 후에도 서로의 안부를 꽤 알고 지낸다. 특수한 진로를 선택할 만큼 비교적 비슷한 시야를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단지 대학생 때부터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인스타그램이 널리 쓰이게 된 덕분일 수도 있다. 그것 이상으로 공들여 주변 사람들 챙기기는 귀찮다. 따로 연락할 필요 없이 좋아요 누르기로 안부를 체크하는 정도가 좋다. 단체 채팅방은 답답하다. 메신저 답변은 겁난다. 꼭 연락을 해야 한다면 언제 어디서 만나자는 구체적인 약속을 잡을 때만 하고 싶다. 게다가 무례하게 구는 사람은 오랜 인연이라도 크게 화를 내고 연락처를 지워버린 탓에 점점 주변이 휑해지고 말았다. 

 

 이런 나와 대척점에 있는 사람은 바로 애인이다. 수많은 단톡방에 오랫동안 속해있으며 주기적으로 청첩장을 받고, 생일 때마다 뜻밖의 인연이 카카오톡으로 선물을 보내주는 사람. 한동안 주말마다 결혼식에 참석하느라 멋진 정장 차림으로 서울을 활보하던 애인을 보며 문득 내 주변에는 결혼하는 사람이 이리도 없나 의아하기까지 했다. 지난번엔 애인의 대학 동기가 판사님과 대검찰청에서 결혼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 친구는 와이프 말이 곧 법이니 잘 따라야겠다는 농담도 곁들였다. 도대체 대검찰청은 어떤 곳일까, 거기 예식장 밥은 맛있을까. 좋은 일로 대검찰청에 방문하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나는 애인을 졸라 함께 서초동으로 향했다. 예식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애인을 보고 반가워하며 다가오자 나는 뿌듯한 동시에 부럽기도 했다. 오랜만에 나를 보고 반가워할만한 지인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중, 고등학교 동창, 군대 동기, 알바 동기, 대학 동기, 직장 동료 모두에게서 주기적으로 만나자는 연락이 오는, 이렇게 오랫동안 주변인들에게 사랑받는 비결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펜과 노트를 들고 옆에 앉아 인터뷰를 시작하자 이 맑은 눈의 애인은 담담히 대답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행동했어요.”

 

 크나큰 충격을 받는다. 이것은 태어나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왜? 모두에게 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 죽이고 싶은 사람한테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나요? 하고 물으니 애초에 애인에게는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사람이 없었다는 답변을 듣고 두 번째 충격을 받는다. 애인에게는 당연한, 내게는 믿기지 않는 이 전제를 두고 이야기는 이어졌다. 학교로 예를 들자면, 한 반의 모두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자신을 떠올렸을 때 괜찮은 사람으로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그래서 두루두루 잘 지내고 자기 몫을 충분히 해내고, 남에게 폐 안 끼치고 공감을 잘하며 속해있는 집단의 목표를 달성하게 조력하도록 행동했다고 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목표를 고려한다니 이것 또한 내 머릿속에 발 들인 적 없는 생각이다. 내가 자의적으로 속하지 않은 집단, 이를테면 학교나 군대 같은 곳에서도 공통의 목표에 순응하고 적극 협조하겠다고? 목표가 내 취향에 맞거나 내가 직접 수립한 것이라면 즐겁게 참여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심드렁하게 관심을 꺼버리던 내 가치관의 뿌리까지 흔들어버린다. 우리가 서로 큰 차이를 갖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 그 차이가 매력적이라고도 생각했고. 그러나 정말 우리는 다른 사람이었어. 내가 장 발장이라면 당신은 자베르 경감이겠지. 아니, 내가 데드풀이라면 당신이 콜로서스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아. 당신은 내가 욕을 하면 깜짝 놀라 말리는 사람이니까. 

 

 두루두루 잘 지내는 두루두루맨으로서 반대의 성격을 지닌, 때로는 흉포하고 때로는 과격한 나를 보고 어떻게 느끼나요.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고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맑은 눈의 콜로서스는 이렇게 답한다. 

 

 “당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저는 절대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과 부딪힐 일이 많아 힘들 것 같기도 하고요. 음, 가끔은 저도 당신처럼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동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때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만약에 당신 방식대로 노력했는데도 일이 안 풀린다면 제 방식을 참고해도 좋겠죠. 반대로 저도 제 방식대로 노력을 했는데 잘 안 된다면 당신처럼 행동해 볼래요.”

 

 교과서에 실릴 법한 완벽한 대답이다. 서로 다른 우리가 여전히 만남을 이어가는 것은 당신의 이런 침착한 태도 덕분이지. 동시에 이런 대답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아봐 주는 내 안목이 뛰어난 덕분이기도 하고. 이렇게 자화자찬해놓은 것을 나중에 읽으면 아마 당신은 피식 웃고 말겠지. 그런 너그러운 마음 덕분입니다, 콜로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