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1219 월 / 할 일 없는 머저리 니트 / 긴개 본문

2021-2023 긴개

1219 월 / 할 일 없는 머저리 니트 / 긴개

긴개 2022. 12. 20. 02:21










누가 할머니를 사랑했을까? 아들 다섯에 딸 둘이면 차고 넘치는 장사였다. 그들도 할머니만큼은 아니지만 저마다 충분한 자식을 두었다. 제일 적은 수 둘로 자식들을 계산해도 며느리, 사위까지 더하면 최소 스물여덟 명의 자손을 거느린 셈이다. 그런데 그 많은 피붙이 중 누가 우리 할머니를 사랑했을까?

최초로 인식한 불결은 무엇이었던가. 오물 가득한 기억을 거슬러 오르며 끄집어낸 후보 중 하나는 바로 할머니 집에서였다. 기억 속 할머니 집에는 정원이 있었다. 정원에는 돌로 된 징검다리가 있었다. 뭔가 가득 찬 장독대 여럿도 담벼락을 따라 들쭉날쭉 모여있었다. 집 안에는 2층으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이 있었다. 나는 거대한 악어 인형 위에 앉아 계단 맨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썰매를 타며 내려오곤 했다. 푹신한 악어 썰매를 타고 있노라면 어느새 다가와 간지럼을 태우며 놀아주던 안경 쓴 사촌 오빠의 웃음이 떠오른다. 대학가 원룸보다 넓던 부엌에는 자개장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 안에는 자기로 된 흰 백조 가족이 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백조 가족을 꺼내 식탁을 호수로 바꾸고 그들이 거기에서 모험을 떠날 수 있도록 도왔다.

어느 명절날, 자가용 뒷좌석에 실린 채 난기류를 만난 비행기 같은 진동에도 아랑곳 않고 오랫동안 깊게 잠들었다 깨어났더니 낯선 동네에 와 있었다. 여기가 할머니네 새 집이라는 말은 단박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알던 할머니 집은 멀리서도 한눈에 집의 전체를 볼 수 있었다. 붉은 벽돌로 된 벽, 대문 아래로 살짝 보이는 푸른 정원과 저 멀리의 지붕, 그리고 창문들. 근데 지금 아빠가 이끌고 가는 할머니 집은 바로 앞에 와서야 거기에 집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집에 들어가려면 계단을 여러 번 오르내려야 했다. 길에서 대문으로 가기 위해, 정원에서 정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러나 이 집은 반대였다. 자꾸만 좁아지는 골목을 따라 여러 차례 계단을 내려가고 나면 구석의 구석에 여러 문이 있었고 그중 하나를 아빠가 두드렸다. 문이 열리자 퀴퀴한 냄새가 훅 퍼져 나와 빠져나갈 수 없도록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할머니 몸에서도 비슷한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을 것이다. 일 년에 두 번 만나는 할머니의 냄새는 모른 척할 수 없게 역했고, 어디 한 번 안아보자는 말에 엉덩이를 엉거주춤하게 뺀 체 겨우 팔을 벌렸던 것 같다. 새 집은 어둡고 좁았다. 큰아버지와 장손도 거기에 산다고 했다. 키가 2미터 가깝게 크고 아빠의 두 배 정도로 무거웠던 장손은 나보다 스무 살 정도가 많았고, 나를 볼 때마다 다가와 어깨와 팔을 천천히 쓰다듬곤 했다. 그러면 남동생이 황급히 둘 사이에 끼어들어 나를 멀리 빼돌렸다. 그 장손에게서도 께름칙한 쉰내가 났다. 큰아버지는 으리으리한 저택을 이런 단칸방으로 바꾸는 마법을 부린 탓에 담배를 입에서 뗄 수가 없었다. 큰아버지 방 전체가 재떨이 같았다. 그리하여 새 집에는 냄새나는 할머니와 큰아버지, 장손이 살게 되었고 명절 때마다 거기에 끌려간 나는 그 집의 장판을 밟느라 양말이 썩고, 벽에 기대느라 윗도리가 썩고, 밥을 먹을 땐 속이 썩는 것 같은 망상에 시달리게 되었다.

할머니는 나를 최초로 때린 외부인이기도 했다. 그는 막내 손주인 남동생더러 크게 될 장군감이라며 가장 따뜻한 자리에 뉘어 재우고 몰래 용돈을 챙겨주는 둥 드라마 속 할머니 같은 모습도 보였지만 내게는 남보다 먼 인물이었다. 어린이라고 왜 모를까. 누가 자기를 아끼고 누가 자기를 미워하는지. 아니, 어린이라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미움을 족히 주셨다. 할머니 댁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는 꾸벅 인사만 하고 스쳐갈 때, 남동생만큼은 오래도록 붙들고 반가움의 곡소리를 내셨다. 이런 장군감이 어떻게 여기에 오셨냐고, 성함이 무어냐고, 올해 몇 살이냐고, 얼른 따뜻한 데 가서 누우라고. 동생이 전기장판 위에 누워 이불을 덮으면 볼을 쓰다듬고 손을 쥐고 한바탕 난리가 이어졌다. 뒤이어 손주 주려 사다 놓은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얼른 꺼내오라고 엄마를 부리면 엄마는 그래도 숟가락을 내 것까지 챙겨 할머니 앞에 갖다 놓곤 했다. 어느 날 동생 옆에 슬쩍 앉아 같이 아이스크림을 퍼먹던 나는 장난기가 돌았다. 동생이 낑낑대며 숟가락으로 퍼낸 아이스크림을 홀랑 가져가 입에 넣은 것이다. 그 순간 할머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장 엎드려뻗치라고. 아마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이었을 것이다. 그 좁고 더러운 집, 친척들이 여럿 모인 가운데 엎드려뻗친 나는 퍽퍽 소리가 나게 엉덩이를 맞았다. 여기서 내가 나를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나는 의연하게 매질을 당하고 벌떡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어, 하나도 안 아프네.”

스무 살 즈음에 가족들은 나를 두고 해외로 이주했다. 아빠는 한국에 남은 내게 몇 번이고 할머니 안부 전화를 명령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전해받은 전화번호를 눌렀다. 할머니는 떨떠름하게 내 안부 인사에 답했다. 예전에 싸웠던 친구랑 우연히 지하철 같은 칸에서 만났을 때, 싸운 걸 까먹고 반가워하던 나만큼이라도 따뜻하게 받아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차피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때가 아마 처음으로 둘의 생각이 통한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할머니는 치매에 걸렸다. 막내아들인 아빠가 한국에 있었다면 큰아버지들과 고모들이 냅다 할머니를 떠맡겼을 텐데, 그렇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홀로 한국에 남은 죄로 나는 또다시 할머니 댁을 방문해야 했다. 다행히 끔찍한 장손과 큰아버지는 치매 걸린 할머니를 두고 어딘가 외출한 상태였다. 할머니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문을 열어줬는데, 뜻밖에도 아주 상냥한 태도였다. 아가씨는 누구냐, 나이는 몇이냐고 묻더니, 아주 이쁘다고 칭찬을 했다. 이뻐서 결혼도 잘하겠다고 했던가, 손도 길고 곱다고 했던가. 절대 아닐 것 같은 사람에게서 칭찬을 듣다 보니 예상보다 오래 머물다 나왔다. 나는 결국 제정신인 할머니와는 끝내 친해지질 못한 거였다.

그 뒤로 다시 할머니를 만난 건 본인의 초상집에서였다. 우는 사람은 적었는데, 그중 하나는 아빠였다. 사실 아빠가 왜 우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본인 학교 갈 돈도 보태준 적 없는 할머니를 왜? 취직하고 나니 그동안 먹여 살린 값 갚으라던 할머니를 왜? 결혼하려고 모았던 엄마 돈 홀랑 가져간 할머니를 왜? 엄마랑 아빠 딸을 그렇게 구박하던 할머니를 왜?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모른다. 이젠 헤아리고 싶지도 않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덕에 동생은 군대 첫 휴가를 훨씬 빠르게 나올 수 있었다. 그때 동생과 찍은 사진을 보면 둘이 아주 활짝 웃고 있더라.

할머니는 내게 여러모로 최초의 인물이었다. 나를 최초로 때린 외부인이자 불결한 집에 초대한 최초의 지인이었으며, 딸자식의 서러움을 최초로 느끼게 한 가족, 그리고 최초로 치매에 걸린 지인이었다. 또한 이승에서의 덕의 중요성을 깨우치게 해 준 최초의 죽은 사람이었다. 살아생전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막내 손자인 남동생은 내게 주어지는 차별 대우에 부당함을 느끼고 점차 할머니를 멀리했다. 모질게 부려먹던 며느리들도 대부분 떠났다. 으리으리한 집도, 북적거리는 명절 풍경도, 허리 숙여 인사하는 식솔들도. 할머니는 내게 마지막 명절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