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0116 월 / 목소리의 포물선 / 긴개 본문

2021-2023 긴개

0116 월 / 목소리의 포물선 / 긴개

긴개 2023. 1. 17. 02:57

 

 

 

 

  미대 입시생 시절엔 다들 한 번씩 기이한 행동을 하곤 했다. 미술대학의 좁은 문틈을 비집고 들어가기 위한 입시의 압박에 돌아버린 것인지, 미술학원에서 30분 간의 쉬는 시간 동안 화장실에 다녀온 다음 끼니를 해결하고 간식까지 구해와야 하는 미션을 매일같이 수행하는 비인간적인 스케줄에 지쳐 돌아버린 것인지 혹은 한국의 수험생이라면 문/이과를 차치하고 누구나 응당 그래야 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나의 경우 수능과 실기의 부담이 끔찍하게 클 때 놀아야 그 재미가 배가 된다는 독창적인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동분서주 놀러 다니며 부모 속을 뒤집어 놓곤 했다. 돌이켜보면 별 것 아닌 일도 그 당시엔 더욱 짜릿하고 즐거웠으므로 그 가설은 나름의 근거를 획득한 셈이었다. 

 

 미술학원 시절의 친구 역시 평생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기행을 그때만큼은 무엇에 홀린 듯 저지르고 말았다. 어느 날 원생 여럿이 학원 옥상에 모여 옆 카페의 정원에서 높게 자라난 나무를 관찰하고 있었다. 푸르고 넓은 나뭇잎과 굵은 가지는 학원 옥상에 가깝게 붙어있었다. 나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도 없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때우기 위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것은 무엇이라도 냉담하고 비관적으로 관찰할 뿐이었다. 우리는 나무에 아주 가깝게 붙어있었다. 그 나무 가지에 주렁주렁 가득 달린 것이 전부 애벌레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연둣빛 젤리들이 생명을 증명하듯 힘차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직시하기 전까진 그저 나무에 지루하게 속해있는 무언가였다. 초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도 모르고 눈만 멀뚱히 뜨고 있던 우리들은 뒤늦게 깨달음의 비명을 질렀다. 비명의 화음 속에서 친구가 갑자기 구석으로 뛰어가더니 벽돌을 집어 나무에 던져버렸다. 너무도 순식간이라 말릴 새도 없었다. 수백 마리의 애벌레를 벽돌 하나로 죽이고 싶었던 것인지, 그저 겁을 주고 싶었던 것인지, 본인의 두려움을 떨쳐내고 싶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벽돌은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 옆 카페의 정원에 둔탁하게 떨어졌다. 우리는 학원 안으로 도망쳤다. 

 

 천만다행으로 아무도 다치지는 않았으나 카페 사장은 학원에 찾아와 정당한 요청을 하고 갔다. 옥상에서 카페로 벽돌을 던지지 말아 달라는 것. 학원 선생님은 범인을 찾지 않았다. 대신 카페 사장처럼 정당한 가르침을 주었다. 옥상에서 벽돌을 던지면 안 된다는 것. 우리는 누가 범인인지 말하지 않았다. 친구의 범행을 밀고하는 고발자가 되기 두려웠고 그 순간을 말리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있었을 것이다. 친구 역시 자신이 저지른 짓에 크게 놀라 한동안 풀 죽어지냈다. 이전에도 그런 돌팔매질을 한 적이 없었고 아마 죽을 때까지도 다시 벽돌로 애벌레를 죽이려 드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후 학원 내에서는 범인을 나로 짐작하는 듯했다. 선생님들을 탓할 순 없었다. 나는 유달리 건방지고 까불고 장난을 많이 치는 학생이었으니까. 게다가 그 친구는 평소 차분하고 진솔한 인상을 갖고 있었다. 아마 멋진 목소리 덕분이었을 것이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까불거리는 코맹맹이 목소리의 나보다 허스키하고 깊은 목소리의 친구가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농담을 해도 뉴스를 전하는 것 같았고 나는 긴급하게 이야기해도 웃기게 들릴 때가 있었다. 말투와 목소리, 평소 행동거지를 놓고 보면 벽돌을 던지는 친구보다 내 모습을 상상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진짜 범인을 말하고 다닐 수도 없다. 암묵적인 눈초리 속에서 진중한 인상의 유용함을 깨닫고 말았다. 까불이가 뒤집어쓰는구나.

 

 상황에 필요한 말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호소력 있는 목소리와 말투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가볍고 힘없는 목소리보다 깊은 우물에서 끌어올려 널리 흐르는 근사한 목소리가 어울릴 것이다. 타고난 발성대로 맥없이 살기엔 남은 예상수명이 길다. 목소리를 바꿔보고 싶다. 글 선생님 말마따나 성우 수업에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업에 가서 목소리를 다듬는 나를 생각하면 조금 부끄럽다. 남들 앞에서 다시 걸음마를 배우는 것 같잖아. 깊은 바다에서 우는 고래들 사이에서 꽥꽥대는 갈매기 꼴일 텐데.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벌써 창피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