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1121 월 / 제목을 지을 시간도 없어 / 긴개 본문

2021-2023 긴개

1121 월 / 제목을 지을 시간도 없어 / 긴개

긴개 2022. 11. 21. 22:47







쓸 이야기가 없다. 몰아치는 일감을 겨우겨우 쳐내느라 온통 모니터 앞에 붙들려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목요일에는 새를 보러 서울숲에 가긴 했다. 소중한 캠코더 캠브릿지와 조류 도감, 쌍안경을 챙겨 뚝섬역에서 내렸다. 셔츠에 니트 조끼, 재킷 차림으로 새를 보러 간다기엔 꽤 멋을 부린 모양새였다. 그렇지만 새를 사랑한 남자 존 제임스 오듀본 역시 셔츠에 재킷 차림을 하고 있는 초상화를 남겼거든. 내 지론이지만 새 애호가들의 드레스 코드는 클래식해야 한다. 점잖고 근사한, 묵직한 멋을 풍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쌍안경을 들고 어딘가를 급히 살펴보는 모습이 수상해 보이고 만다. 멋 이전의 실용성의 문제로, 멀끔한 의복 차림은 쌍안경을 들고도 주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지 않는 부드러운 방법이 될 수 있다. 게다가 클래식한 차림이라면 대개 자연의 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베이지, 카키, 아이보리, 브라운 안에서 골라 입으면 가을의 갈대밭에 숨어 새들을 놀라게 하지 않고 관망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말 바빴다. 이왕 멀리 나간 김에 근처 갈 만한 곳도 들러줘야 했기 때문이다. 서울숲에서 새를 봤다면 밥은 성수동에서 먹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그러니 또 연인들과 멋쟁이들 가득한 성수동 거리를 휘적휘적 지나 맛있는 밥을 먹었고, 비록 울음소리 아름다운 밀화부리와 되새 무리는 찾지 못했으나 작고 때깔 좋은 물총새와 물 위를 예수처럼 걷는 논병아리 무리를 보지 않았던가. 입문용 핸디캠으로 화질에는 한계가 있었으나 평소에 찍지 못했던 영상을 마음껏 찍어둔 터라 배도 마음도 든든했다. 우연히 마주친 다른 탐조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 것은 허나 마음에 걸렸다. 티탄족의 텀블러 같이 생긴 기다란 망원 렌즈와 삼각대, 어두운 옷차림의 남자 둘을 보고 나는 또 대뜸 말을 걸었지. 새 보러 오셨냐고. 나는 탐조인들이 만나면 단번에 서로의 영혼 그 가운데 놓인 백색의 깃털을 확인한 뒤 엄중한 악수를 나누고 조류의 멋을 심층 토론하는 즐거운 야외 살롱을 만들게 될 것이라 의심치 않았는데, 그만 둘의 눈빛에 의심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 내가 품은 것이 그 가볍고 따뜻한 깃털이 맞노라 말하고 싶었으나 어떤 언변으로도 우리가 통하게 될 일은 없을 것 같았네. 만약 나도 팔뚝만큼 길고 얼굴만큼 직경이 큰 망원렌즈를 지참했더라면 그 무리에 낄 수 있었을까. 작고 가벼운 내 핸디캠 캠브릿지가 사이에 끼어들기엔 무리의 격을 낮추는 꼴이 되었을까. 일반인들의 불안을 덜기 위해 선택한 멋진 의복이 탐조인들에게는 아직 정착되지 않은 드레스코드여서 오히려 내부의 불안을 일으킨 걸까. 더 묻고 더 나누고 싶었으나 조용한 관찰을 방해하는 자는 탐조인의 세계에서 엄중 처벌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쯤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중 친절한 이는 밀화부리와 되새 무리가 오전에 관찰되었다는 귀중한 정보를 나눠주긴 했다. 나는 답례로 드릴 것이 없었다. 그래서 얼마 뒤 작은 호수에서 물총새와 논병아리를 발견했을 땐 종추*의 기쁨과 더불어 그 친절한 탐조인에게 이 정보를 나눠야 한다는 조바심이 일었다. 서울숲을 떠날 때까지 다른 새의 흔적과 그 탐조인 둘의 흔적을 함께 좇았으나 둘 다 찾질 못했다. 그 둘의 눈에서 의심을 지우고 드디어 고이 간직했던 새 이야기를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나눌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봄과 가을에 진정한 탐조인만 떠난다는 섬 탐조를 함께 다녔다면 얼마나 즐거운 추억을 쌓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함께 새를 보러 다닌 뒤엔 할로윈에 서로 좋아하는 새의 색으로 옷을 갖춰 입고, 크리스마스엔 새 모형과 그림을 경품으로 걸고 게임을 하며 따뜻한 연말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질 못했네.


이렇게 바쁘니 할 수 없는 게 정말 많다. 캠브릿지로 매일 재미있는 순간들을 찍어 밤마다 하루 치의 영상을 편집하고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뒤 잠들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산을 걷다가 본 풍경, 우연히 마주친 작은 새, 강아지와의 산책, 회의가 끝난 후의 모습, 동네 새로운 바에 갔던 순간을 짧게 짧게 기록한 뒤 밤에 모두 모아 하나로 편집한다. 새를 소개할 땐 정보를 자막에 담는다. 이렇게 편집한 영상을 업로드하면 소스가 되었던 짧은 영상들은 전부 지운다. 매일 찍고 매일 지운다. 정말 바빠서 이렇게밖에 할 수가 없다. 하나의 짧은 영상으로 하루를 돌아보는 것은 꽤 신기한 일이다. 기억 속에선 희미했던 순간이 동일한 등장인물과 동일한 배경을 동일한 속도로 영원 속에 가둬진다. 클라우드와 인스타그램, 기기에 각각 업로드된 영상들이 다시 제각기 재생되며 새로운 영원을 찾고 새로운 기억을 만든다. 그 사이사이 내가 잘라낸 재미없는, 심심한, 단조로운 순간들은 반대로 기억과 메모리카드에서 지워져 누구도 재생하지 않는다. 자르고 이어 붙인 순간들은 의도한 맥락을 지녔지만 의도대로 읽힐 리도 만무하다. 게다가 이렇게 매일 일상을 올렸더니 점점 반응이 줄어든다. 남의 몇 분 짜리 일상에 세세한 관심을 가질 만큼 한가한 사람도 없겠지. 나만 내 일상을 다시금 돌아본다. 그것도 웃긴다. 내가 찍고 내가 편집하고 내가 보는 일상의 편집된 순간들. 재미없는 사이사이를 잘라낼 필요도 없었던 것 아닌가. 너무 바쁘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 종 추가의 줄임말. 새로 발견한 포켓몬을 포켓볼에 담는 것처럼, 새로 발견한 새를 내 기억 속에 담아두면 종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