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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1128 일 / 피는 물보다 걸쭉하고 저주 같아서 / 긴개 본문
그 촌 동네에서 외할아버지는 매끈한 빽구두를 신고 다녔다. 마을에 티비도 몇 개 없던 시절에 돈을 내고 춤도 배우러 다녔다. 그동안 외할머니들은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고 밤나무도 길렀다. 아들 셋, 딸 둘에 남편까지 먹여 살리려 양계장을 치고 쌀집을 열고 월세방을 굴렸다. 아스팔트도 없던 흙길을 흰색 양복 차림으로 순회하던 할아버지는 학비가 아깝다고 엄마의 고등학교 입학을 반대했다. 이모의 도움으로 입학은 겨우 했지만 교통비 타낼 곳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엄마의 결혼식에도 한 푼 보태지 않았다. 그 답례로 엄마 역시 할아버지 장례식에 눈물 한 방울 보태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모르고 있었다. 두 번째 할머니가 어디엔가 살아계신 것도 잊었다. 근데 할아버지 장례식에 왜 나를 안 불렀을까. 다들 정신이 없었을 수도 있고, 내가 가봤자 도움이 안 될 거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긴 육개장 좀 깨작거리다가 친척들과 대화하기 싫어서 카페로 도망갔겠지. 아니면 동생과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쿡쿡 웃었을 것이다. 아마 장례식장에 도착해서야 할아버지와 할머니, 삼촌들의 이름을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급하게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몇 층 어디로 가야 할 지 물었을 것이다. 안 가길 잘했다.
그런 엄마 앞에 내가 흰색 웨스턴 부츠를 신고 나타났다. 엄마는 이게 어디서 났냐고 눈이 휘둥그레했다. 부츠를 벗고 들어가 짐을 내려놓는 동안 엄마는 현관에서 그걸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 예의 그 할아버지의 빽구두 이야기를 꺼냈다. 너네 할아버지는 그 시절에 그 흙먼지 날리는 동네에서 혼자 흰 양복에 빽구두를 신고 다녔다고,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원래 흰 옷이나 흰 신발은 돈 있는 집안에서나 사는 건데 하고 엄마가 중얼거렸다. 하필 또 흰색 니트를 입고 흰색 가방을 메고 간 참이었다. 힘 빠진 목소리로 으으응- 하고 말았다.
엄마 생일 선물로 사 온 진주 목걸이보다 애인에게 선물 받은 내 부츠가 더 비쌌다. 목걸이는 막상 엄마 목에 둘러보니 알이 너무 작아 예쁘지 않았다. 내 부츠는 너무 크고 흰데, 엄마 목걸이는 희미하게 옷 속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내가 고른 건 민물에서 양식한 담수 진주로 비교적 크기가 작고 저렴했고, 엄마가 좋아하는 건 동그랗고 광택이 좋은 해수 진주였다. 진주를 사본 적이 있어야지. 자연에서 저절로 만들어지면 모양이 울퉁불퉁해져 더 좋은 천연 진주일 거라 생각했다. 동그란 진주보다 싸지도 않던데… 엄마는 목덜미를 거울에 비춰보더니 여름에 어울리겠다고 말해줬다. 아직 11월. 민망했지만 잘 어울리고 예쁘다고 칭찬했다.
목걸이는 금세 잊히고 엄마는 또다시 현관으로 가 부츠를 집어 들었다. 이런 부츠는 관리 잘 해야 하는데- 하며 현관 신발장 서랍을 뒤져서 구두약을 하나 꺼냈다. 잠옷으로 쓰이던 흰 티셔츠에 무색의 크림을 묻히고 부츠를 구석구석 닦았다. 몇 번이고 관리 잘하라 당부하며 그 구두약을 가방에다 넣어주기까지 했다. 귀찮은데 그냥 물티슈로 닦으면 안 되냐고 하려다가 얌전히 받았다. 엄마는 새로 하나 사면 된다고 했다.
150번 버스로 컴컴한 밤길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닦은 지 얼마 안 됐지만 괜히 나도 부츠를 벗어 들고 살폈다. 크림을 휴지에 묻혀 닦았더니 금방 찢어졌다. 휴지 말고 어디 천 같은 거 없나- 하고 현관의 서랍을 열었더니 구두약이 또 있었다. 재작년에 산 검은 구두를 보고 엄마가 이런 건 관리 잘해야 한다며 챙겨준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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