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1101 월 / 순백의 산타클로스 / 긴개 본문

2021-2023 긴개

1101 월 / 순백의 산타클로스 / 긴개

긴개 2021. 11. 1. 22:11




순백의 산타클로스




영암군의 특산품 광고 모델은 씨름 선수들이었다. 고속버스터미널 승강장 의자에 앉아 11번 게이트 위 커다란 전광판을 넋 놓고 보다가, 웃통을 벗은 채 울룩불룩한 근육을 뽐내는 남자들 덕분에 흠칫 놀랐다. 가슴팍에 무슨 상자를 안고 있었는데 근육을 흘끔거리느라 그 속에 든 게 해삼인지 고구마인지도 보지 못했다. 특산품 광고 모델로 적합한지는 모르겠으나 영암군이 어디에 있는 지는 알고 싶어졌다.

벌써 친구 중 셋이 결혼을 했다. 셋 다 서울 아닌 동네에 살고 있다. 아무래도 집값이 싸야 초혼 연령이 낮아지는 모양이지. 신나서 결혼해놓고 어떻게들 지내는지 궁금하다. 10월, 토요일인 오늘도 네 번째 결혼식에 간다. 예식장에 12시까지 도착하기 위해 출근하는 날보다 일찍 일어났다. 고속버스를 타고 산이며 들이며 경치를 감상하며 갈 생각이었는데, 서울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가 도착지 근처에서야 겨우 깨어났다. 맨 얼굴이면서 화장을 고치는 척 마스크 아래로 침 자국을 닦았다.

결혼식장은 바글바글. 신부 아버지는 나를 몰라봤으면서도 안드로이드처럼 웃으며 인사를 하셨다. 신부 대기실에는 키가 나(약 173cm)와 비슷한데, 결혼 준비하느라 살이 쏙 빠져 50 kg가 채 되지 않는 앙상한 친구가 앉아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신부 곁에 사람들이 차례로 앉아 사진을 찍고 돌아가는 모습이 꼭 크리스마스 무렵에 산타클로스를 만나러 온 아이들 같기도 했다. 나도 받고 싶은 선물을 말하려 냉큼 옆에 앉았는데, 아사 직전의 산타클로스가 내 귀에 속삭였다.

“웃느라 입에 경련이 날 것 같아요.”

그러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던 신부는 그 웃는 낯으로 끝까지 임무를 수행했다. 첫 데뷔인데 아주 프로페셔널했다. 친구들과 단체 사진을 찍을 때 가까이에서 보니, 도우미 이모님이 신부의 가느다란 어깨에서 자꾸만 흘러내리는 드레스를 고정하느라 온몸에 핀을 찔러넣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싸고 깔깔 웃는 죄 많은 우리들을 대신해 그녀 혼자 벌을 받는 것 같았다.

식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우등버스를 탔다. 경치고 뭐고 쿨쿨 잘도 잤다. 집에 돌아가기 전 터미널 안에 있는 국밥집에 들렀다. 볼에 콩나물을 튀겨가며 배를 채우다 게이트 위 전광판을 보니 아침에 본 그 영암 민속씨름단의 근육 예찬 광고가 상영되고 있었다. 지금도 그 품에 뭐가 안겨있었는지 모르겠다.






긴개의 사자성어 한참 쓰다 말고 한 달을 꼬박 쉬었다. 그 동안 글쓰기 수업도 다니고 만화 만들기 수업도 다녔다. 티스토리에는 올리지 않았지만 오프라인에서 얻어낸 결과물이 많았다. 그만큼 정신없고 바빴던 시월이 지나고 이제 연말이 성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