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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 토 / 망아지 끼니 챙기기 / 긴개 본문
망아지 끼니 챙기기
핸드폰을 켜보니 9시 51분. 요가 수업은 10시부터. 후다닥 나오다가 침실 문 앞에 웅크리고 있던 첫째 고양을 밟을 뻔했다. 바지를 다리에 끼우다 고무 밴드에 발가락이 걸려 비틀거렸다. 열쇠를 챙겨 문밖을 나섰다. 내리막길을 슬리퍼로 짝짝 뛰어 내려가는데 양 볼이 낯설게 상쾌하다. 왔던 길을 도로 뛰어 올라가 현관문을 열고 마스크를 집어 들었다. 다시 내리막길을 짝짝.
3분 거리의 요가원에 도착해 숨을 고르고 자리에 앉았다. 땀을 삐질 흘리며 관절을 어색한 방향으로 꺾는다. 긴 몸뚱이는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엉성하다. 다섯 달째 요가원에 다니고 있는데, 여전히 할라아사나*와 살람바 시르사아사나**가 어렵다. 다른 자세도 어렵지만 이건 나아질 기미가 없다. 언젠가는 되겠지 느긋하게 기다리려 했는데 오늘은 울화가 치민다. 도대체 내 소프트웨어는 언제쯤 본체와 한 몸처럼 합을 맞추게 될는지. 내 머리로 내 몸을 조종하지 못하는 무력한 순간에 하다못해 깨달음이라도 얻으면 좋을 텐데, 땀이 마르고 난 자리에 남은 건 조급함 뿐이다. 이런 마음가짐이 발전에 필요한 원동력은 아닐 텐데. 아냐, 이런 사람이야말로 요가를 배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거지. 사바아사나***에 들고 나서도 잡생각이 가을 모기처럼 귓가를 맴돈다.
한 시간 동안의 하타 수업 후 머리채를 뜯기며 싸운 꼴로 귀가했다. 파리바게뜨에서 눈에 띄는 대로 집어 온 샌드위치를 식탁에 앉아 입에 욱여넣고 또 일어났다. 휴일의 직장인이지만 고양들처럼 널브러져 있을 수 없다. 얹혀사는 두 놈 덕에 온 집안에 모래와 털이 가득하다. 작업실에 둘을 잠시 가둬놓고, 현관문과 창문을 열어 햇볕도 모시고 바람도 들르게 한다. 고양 화장실의 오래된 모래는 종량제 봉투에 붓고, 물을 뿌린 뒤 솔로 박박 닦아 말린다. 고양들 주무시는 이불도 밖에 널어 일광 건조 시킨다. 정전기포 끼운 밀대로 방들을 돌며 먼지를 수집한다. 이후 물걸레질도 필수. 이참에 꽁꽁 싸매 둔 겨울옷도 꺼낸다. 10월 초에 반팔을 입다가 10월 중순부터 패딩을 입는 나라에서 살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각 잡아 갠 옷을 서늘하고 건조한 곳에 보관한다. 꼴 보기 싫게 아무 데나 뒀다간 다음 계절 올 때까지 서로 어색하게 지내야 하니까 처음부터 위치 선정을 잘 해야 한다.
땀 마를 새 없이 움직인 뒤에야 오늘 처음으로 몸에 물을 묻힌다. 요가 하며 흘린 땀, 고양 화장실 치우다 뒤집어쓴 먼지, 고양 털 등을 뜨뜻한 물로 씻어낸다. 피할 수 없는 루틴 중에선 가장 마음에 든다. 거품 가득한 머리를 마사지하며 잠시 입을 헤- 벌린다. 모두 헹궈낸 다음엔 물기를 닦고 로션을 바른다. 그대로 식탁에 돌아와 앉으니 배 속이 크게 울린다. 요리할 힘도 없고, 배달 시간 견딜 인내심도 없다. 동네 친구 있다면 얼른 불러낼 텐데 다들 현명하게 마포구에 사네.
1인 가구 구성원에게 끼니 챙기기란 파도의 땅에서 모래로 성을 쌓겠다고 덤비는 일이지. 때 되면 빚쟁이처럼 허기가 몰려온다. 냉장고는 잘살아 보겠다고 때려 넣은 채소들의 관이 되었고, 기름때 닦던 공포가 떠올라 함부로 가스레인지 켜기도 힘들다. 싱크대 물때엔 학을 뗄 것 같고, 찔끔찔끔 생기는 음식물 쓰레기 모아 봉투 채우다간 썩는 냄새에 혈압이 오른다. 도무지 이 주방과 친해질 자신이 없네. 나 하나 먹여 살리기도 이리 고된데 두셋 입을 늘릴 수 있을까.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주변 사람들과 즐겁고, 사지 아직 제자리에 있는 과분한 나날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일상의 과업에 목이 턱 졸릴 때가 있다. 다섯 달 배운 요가보다 10년 해온 집안일이 더 나을 것도 없다. 평생 해야 할 일인데 벌써 권태가 오면 안 되지. 겸허하게 수련처럼 받아들여야지. 그런데 돈 주고 배우는 요가도 짜증 날 때가 있는데, 집안일 정도는 당연히 신물 날 수 있는 거 아냐? 내 꿈은 이제부터 가사 도우미 고용하는 사람. 빨리 로또 사러 가야지. 여전히 배는 꼬르륵 울린다. 나가자. 아까 꺼내둔 패딩을 훌렁 걸치고 신흥시장의 신코로 간다. 작은 바 신코의 메뉴는 혼자 온 손님에게도 친절하니까.
짐빔 하이볼과 오차즈케 하나를 주문한다. 오차즈케는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다. 밥 위에 빨간 매실장아찌, 후리카케(김, 가다랑어포, 소금, 깨) 올리고 따뜻한 녹찻물 부어 낸 심심한 한 그릇. 별것 없는 이 음식이 간간이 떠오른다. 멍하니 바에 앉아 빨대로 하이볼 한 모금 마시고, 오차즈케 푹 떠서 한 입 우물거린다. 종일 분주하게 움직였으면서도 좀처럼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더 쓰고 읽고 배우고 벌고 움직여야 할 것 같아. 할라아사나도, 살람바 시르사아사나도 얼른 성공하고 싶은데. 그러다가 또 오차즈케 한 입. 슴슴한 국물이 술술 넘어간다. 저번에 사둔 책도 다 안 읽었는데 오늘 또 책을 샀어. 이건 또 언제 읽으려고 그래. 그러다가 매실장아찌 한 입. 내일도 온종일 바쁠 텐데 벌써 피곤한 기분이야. 남은 국물은 여전히 따뜻하다. 잘 해낼 수 있을까. 후룩-
신코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계단을 걸었다. 한 친구는 누구의 보폭에도 맞지 않는 이 멍청한 계단을 쩔뚝계단이라고 불렀다. 엇박자로 타닥타닥 우스꽝스럽게 걷다 보면 이상하게 웃음이 절로 난다. 뱃속이 데워져서인지, 하이볼 덕분인지, 쩔뚝계단 덕분인지 아까 했던 고민들이 잘 떠오르질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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