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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에세이 (68)
성북동 글방 희영수
식당에서 주문한 메뉴가 나오기 전까지 무엇을 하며 기다려야 좋을지에 대한 속 시원한 답을 오랫동안 찾아왔다. 카페라면 한결 수월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곳만의 재미있는 인테리어를 하나하나 뜯어볼 수도 있고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뒤적거려도 된다. 애초에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각오를 하고 가는 곳이기도 하고. 그러나 오로지 식사를 위해 방문한 식당에서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주어지는, 짧다면 짧고 (어색한 사람들과 함께라서)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뭘 하면 좋을까. 함께 온 이들을 위해 수저를 놓아주고 컵에 물을 따라 나눠주며 한바탕 부산을 떨고 난 뒤에도 여전히 음식 소식은 요원하다면? 나는 그 답을 에밀 출판사의 『놀라운 리얼 종이접기 2 - 하늘을 나는 생물 편』에서 찾았다. 사각주머니*를 미리 접어..
엄마가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달라고 했다. 사실은 그 말을 미처 꺼내기도 전에 나는 알았다. 부름의 의도에 따라 자신의 목소리 톤과 억양이 세분화되어 있다는 걸 엄마는 몰랐을 것이다.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자마자 그 음파가 뒤이어 주문하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나는 인형술사가 일으킨 목각인형처럼 벌떡 일어나 그대로 현관문으로 뛰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 잡힐 것이 뻔했으므로 한 번에 세네 칸씩 계단을 펄쩍펄쩍 뛰어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으로 빙글빙글 휘감긴 통로 위에서 엄마가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소리쳤다. 야 이 망할 년아 - - - - - 위 기억은 중학생 때의 것으로, 그때의 나는 어떻게든 남이 시키는 것을 하지 않으며 살고자 노력했다. 지금도 직장에 다니고는 있지만 고분고분시키는 대로 따르..
이사 온 동네에서 가장 반가운 건 역시 아카시아 나무다. 출퇴근 할 때 마을버스를 타고 고작 두 정거장을 이동하는 대신, 산을 구불구불 가로지르는 하나의 길을 따라 약 25분 가량을 걸어다니기로 했는데 처음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때는 그들도 조용히 꽃송이를 다물고 있었을 때였다. 그러나 이사한지 일주일이 지나갈 무렵 도저히 코를 킁킁대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진하고 매혹적인 향기가 산 전체에 스며들었고 그제야 이 산 전체에 높이 10미터는 족히 넘을 아카시아 나무들이 서로 손에 손을 잡듯이 빼곡히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매년 피어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두 종의 꽃 중 하나가 이렇게 집 가까이 가득하다니 1.6배 오른 월세가 아깝지 않았다(다른 한 종은 수수꽃다리이다). 아카시..
내가 나에게 해주는 좋은 말들은 탁 트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서 외치는 소리처럼 잘 전해지지 않는다. 반대로 남이 내게 해주는 구린 말들은 아무리 먼 곳에서 소근거려도 고막에다 바로 때려박는 것처럼 생생히 들리는 데다가 온 몸에 붙은 고양이털처럼 쉽게 떨쳐내기가 힘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자랑스러워 하려다가도 오래전에 들었던 어떤 말 하나 때문에 입술만 달싹이다가 그치곤 했다. 그 말은 사실도 아니고 영양가도 없고 더럽게 재미도 없었지만 고등학교 졸업사진처럼 끈질기게 내 발목을 잡았다. 남의 말로 족쇄를 차는 것은 불행하다. 차라리 모래 위에서 타이어를 끌면 근육이라도 늘텐데 족쇄는 갈수록 발목을 조여 한 걸음 떼기도 힘들게 된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잠시 유체이탈을 해야한다. 지친 몸에서 ..
환승할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에 서 있던 5분 동안 문득 생각했다. 어떻게 두 발을 딛고 서있는 걸까. 발바닥과 복사뼈, 무릎 관절과 배꼽 아래가 전부 토도독 흩어져 쓰러질 수도 있잖아. 발아래, 신문을 펼친 정도의 좁은 땅은 언제든지 계란 껍데기처럼 잘게 조각나 그 사이로 스르륵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저 멀리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아래는 크고 단단하고 두꺼운 지구가 받치고 있다. 축축하고 더운데 사람들 뒤로 아지랑이가 보인다. 걱정 없는 사람들이 앞으로도 뒤로도 바쁘게 가버리고, 나는 몸을 멀쩡히 세워놓고도 자꾸 떨어지는 기분이다. 노트북이 든 가방이 어떻게든 나를 땅에 메다꽂을 것만 같고. 대체로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다. 왜냐하면 선택지가 둘 뿐이기 때문이다. 너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긍정적으로 볼래..
다림판 없는 다림질은 로프 없는 번지점프요, 쌍안경 없는 탐조와도 같고 마우스 없이 디자인하는 꼴이라 할 수 있다. 위험하고 불편하며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단 말이다. 다림판 없이 다림질을 해보겠다고 이 년 넘게 버텨보았지만 다리미의 짝꿍은 식탁도, 책상도 될 수 없었다. 오로지 천이 두툼하게 깔린 아름답고 오묘한 곡선의 다림판만이 다리미의 짝꿍으로서 어울리는 격을 지녔던 것이다. 자취 10여년 차, 드디어 다림판을 샀다. 다림질이란 어쩐지 내 삶에 파고들만한 부류의 일이 아니었다. 옷은 빨기도 귀찮고 널기도 귀찮은데 또 개기도 귀찮고 입기도 귀찮은, 그러나 존엄한 인간의 생필품으로서 그 무게를 짊어져야만 하는 허물이요 허상이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가디건에 경량패딩, 숏패딩, 롱패딩, 코트, 재..
“가구는 주워다 쓰는 거 아니래요. 특히 나무로 된 건.” 우리집을 휘- 둘러보며 애인이 한 말이다. 왜 주워다 쓰면 안 되지? 내다 버린 사람은 더이상 알 바가 아니고, 한 가구를 여러 사람이 오래도록 사용하는 편이 환경에 도움될테니 오히려 권장해야 할 만한 태도 아닌가? 가구를 주워다 쓰면 안 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싶어 구글에 검색해보니 대부분 미신 이야기 일색이다. 이런 이유라면 상관없지. 남이 살던 집에서도 살면서 남이 쓰던 가구는 못 쓸 게 뭐람. 물론 침대 매트리스 같은 건 패스. 혹시 곤충들이 나무 결 사이사이에 쏙쏙 박혀 함께 이사오기 때문인가? 음흉하게도 그 속에다 알을 낳아두기 때문인가? 그런데 누군가 그것을 내다버리고, 내가 주워오는 그 짧은 사이에 곤충들이 그렇게 잽싸게 뛰어와 ..
일본 사람들은 자전거를 많이 타더라. 봉미선 씨가 자전거 뒷자석에 짱구를 태우고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건 자전거를 유달리 좋아해서 그런줄 알았지. 오사카에 갔더니 글쎄 어디든 자전거를 탄 사람이 있더라. 평화롭지만 어딘가 이질적인 풍경. 그러고보니 한국처럼 쫄바지에 헬멧을 쓰고 고글을 낀 무리가 없었다. 정장 차림의 회사원, 원피스를 입은 사람, 식료품을 바구니에 담고 지나가는 사람. 전부 일상복 차림이었다. 졸릴 듯 평온하지만 묘한 분위기는 이것 때문이었나. 돌이켜보면 최근 한국에서 유행했던 말, ‘자라니(자전거와 고라니의 합성어)’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요즘은 자전거 하나로도 그 사람의 많은 걸 추측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지역마다 공공자전거 시스템이 생겨 근거리를 이동하는 시민들에게 소소한 즐거움과 ..
친구가 온라인 쇼핑몰을 열었다기에 들어가보니 이미 많은 상품이 품절된 후였다. 오픈하자마자 들어온 건데 어떻게 벌써 팔렸지? 몇만 명의 팔로워가 있는 인플루언서나 되어야 완판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은가? 의아해하던 중에 어떤 분이 그런 품절 전략이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인기가 없던 브랜드라도 품절된 상품이 많은 척하면 사람들이 그걸 사고 싶어 사이트를 들락날락하게 된다는 전략. 정말 그래서일까? sold out 회색딱지가 붙은 옷들은 그렇지 않은 옷보다 내게 더 잘 어울릴 것 같고, 저 옷이 없으면 당장 내일부터 입고 나갈 옷이 없을 것만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이. 친구네 사무실에 직접 쳐들어가서 저 옷을 뭉텅이로 훔쳐 나와야만 발을 뻗고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이 드는 ..
어른의 간식 담배, 그거 맛있습니까? 백해무익한 독입니다 독. 이렇게 말하는 나는 끊었습니다. 어때요 한 마디 할 자격 있지요? 독하게 마음 먹고 끊은 건 아니랍니다. 그냥 옷과 머리칼에 냄새가 배고 가래가 생기는 게 싫어서 더 피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남자친구한테 비흡연자인척 했거든요. 거짓말하면 귀찮으니까 끊기로 했습니다. 안 피운 지 일 년이 넘었습니다. 옆에서 누가 피워도 안 땡깁니다. 사실 원래도 많이 안 피웠습니다. 한 달에 한 갑? 비흡연자는 아니고, 반흡연자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담배는 왜 피웠던 걸까요. 들이마시면 목을 턱 조이는 연기와 길게 내쉬는 숨이 하얗게 퍼져가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친구가 피워서 따라 피웠나? 아빠가 피우니 따라 피웠나? 왜 그랬을까. 어른의 간식 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