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걷는 좁은 골목에 지저분한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 골룸 시체라도 질질 끌고 간 것 같았다. 짙은 누런색의 자국이 5미터는 넘게 이어졌다. 자세히 보니 점이 가득했다. 점이라기보단 덩어리, 덩어리라기보단 건더기 같은 것이었다. 짜잔. 놀랍게도 전부 구더기였다. 환경 보호를 위한 식용벌레 아이디어에 대찬성 의견을 밝혀왔는데, 잠시 철회하고 싶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냐던데, 두 번 다시 그 골목은 못 걸을 것 같았다(하지만 훌륭한 지름길이라 결국 저녁에도 지나가고 말았다). 구더기는 손가락 한 마디보다 긴 것도 있었다. 내 손이 꽤 큰 편인데도 말이다. 말 그대로 바닥에 구더기가 득실득실했다. <크리스마스 악몽>(1993)의 악당 우기부기가 칼로 찔린 뒤 기어가기라도 한 모양이었지만 범인은 다른데 있었다.
자국의 끝에 음식물쓰레기 수거용기가 있었다. 이 수거용기는 대체로 비둘기 시체 같은 색이어서 칙칙한 서울 풍경에 투명히 녹아든다. 환경미화원의 눈을 피해 몇 달간 숨어있던 음식물쓰레기가 이제야 발각이 된 걸까? 그래서 환경미화원이 그 끔찍한 봉투를 들고 가는 동안 구더기가 줄줄이 떨어진 걸까? 그런데 아무리 수거용기 안에 있었다고는 해도 혹한기의 음식물쓰레기에 어떻게 이 많은 구더기가 생겼을까? 수거용기를 이제껏 집안에 두었다가 뒤늦게 밖에 내놓은 걸까? 그럼 그동안엔 어떻게 나머지 음식물쓰레기를 처리했을까? 아니면 누가 죽은 거지. 음식물쓰레기에 구더기가 불어나는 걸 내버려 둘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몸이 굳고 썩어버린 거지. 시체를 발견하고 집을 둘러보니 음식물쓰레기에 새로운 차원의 생태가 펼쳐지고 있던 거지. 그런데 아무리 썩은 음식물이라도 결국 음식물쓰레기로 분류하고 환경미화원이 치울 수밖에 없었던 거지. 불쌍한 환경미화원은 졸지에 손을 타고 기어오르는 구더기를 떨쳐내며 겨우 주어진 일을 완수한 거지. 그럼 시체는 누가 치웠을까. 누가 죽었을까. 혼자 살고, 음식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을 거야. 오전에 생각한 것.
그나저나 날씨가 몹시 해이해졌다. 내복을 두 겹이나 입고 나왔는데 이놈의 날씨가 자기 혼자 뜨뜻미지근해졌다. 퇴근하고 집에 가니 겨드랑이에서 땀이 배어 나와있었다. 누구 하나 죽일 듯 휘몰아치던 추위가 제풀에 지친 걸 보니 2월도 다 죽었네. 삼 주 전의 추위는 태어나서 처음 겪는 것이었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팔짝팔짝 뛰어도 정신이 아득해지게 추웠다. 얼마나 시달렸던지 집에 돌아와 씻지도 않고 잠들었다. 그 뒤로 일주일 간 등산복 웹사이트를 들락거리며 시즌오프 패딩을 이제라도 구매해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했다. 절대 2월을 우습게 보지 말겠다 다짐하고 오늘도 팔 오금이 뻑뻑할 정도로 내복을 껴입었는데. 귓가에 스치는 바람이 부드럽지 뭔가. 호되게 추울 땐 입지 못했던 코트나 자켓이 이제 답답하게 느껴져 겨우내 한번도 못 입다가 정리하는 날이 곧 온다. 삼십여 년간 겪은 봄여름가을겨울이 매번 믿기지 않는 건 내가 멍청해서일까, 날씨가 멍청해진걸까. 날씨는 질리지 않고 우리를 놀라게 하는구나.
라디오헤드가 가끔 나를 멈춰세운다. 기억이 몇 번이고 되감긴다. 없던 우울도 불러들이는 표정으로 흥얼거리게 된다. but I'm a creep 하기 전에 조니 그린우드가 기타를 줘패는 장면과 톰 요크가 no surprises에서 물이 빠지자 잠겨있던 얼굴이 짓는 표정은 잠들기 전 천장에 띄워놓고 보고 싶다. 가끔 사람들에게 나는 도통 우울한 걸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오만과 민망이다. 내 회복력은 남들보다 강하다고, 이성과 의지로 쉽게 이겨내는 사람이라고 으스대고 싶었던 것이다. 혹은 정말 심각한 우울을 겪는 친구 앞에서 괜히 나도 만만치 않다고 끼어들며 어줍잖게 우울을 견주게 될까봐 그정도는 아니라고 손사레친 것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특히 우울은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기가 참 난감하다. 이런 일로 우는 소리 하는 걸 누가 듣고 싶어할까. 밖에다 떠들어도 해결해야하는 건 결국 나이지 않나. 남이 들어준다고 해도 결국 해줄 수 있는 말엔 한계가 있지 않나. 떠들 시간에 해결 방법을 찾으면 되지 않나. 그러나 나를 휘청이게 하는 일들에는 대체로 명확한 해결방법이 없었고, 우울 속에 가라앉는 것도 그 때문이며 결국 타인에게 떠들다가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나 하고 돌아보면, 지금 필요한 건 리액션이 좋은 친구 한 명이다. 그리고 초콜렛 한 통. 식물성 팜유 든 것 말고.
다음 날 출근길 같은 골목에 할머니 두 분이 있었다. 그 양반이 이틀 전에 돌아가셨잖아. 어머 나 그 양반 일주일 전에 봤는데! 그래 그 사이에 돌아가셨다니까. 어머 나 그 양반 일주일 전만 해도 같이 밥을 먹었는데. 그래 그 양반이 근데 쓰러지고 삼 일만에 돌아가셨다니까. 어머 이렇게 갑자기! 둘의 머리칼은 투명한 흰색이었다. 오그라든 어깨로 보아 여든은 가뿐히 넘을 듯 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그제야 천천히 길을 비켰다. 두 분에게도 죽음은 믿기 힘든 일이구나. 나이 먹는다고 죽음이 당연해지진 않는 거지. 좀더 걸으니 어제의 구더기 구간이었다. 여러 번 밟혔는지 구더기는 수가 줄고 납작해져 있었다. 살아남은 구더기는 하나도 없나. 꿈틀거리는 놈을 발견하면 반가울까, 밟고 싶을까. 둘 다 아니어서 빠르게 걸었다. 발이 좀더 작았으면 좋았을걸. 죽었든 살았든 다른 몸 위에 서고 싶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