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도보 순례와 새 팬티 수배령 _250318 본문

2025 긴개

도보 순례와 새 팬티 수배령 _250318

긴개 2025. 3. 19. 01:24

 
 죽기 전에 최고의 팬티를 찾을 수 있을까. 좋은 팬티를 찾는 건 좋은 애인을 구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두어 달째 여러 속옷 브랜드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한 달 뒤 수십 명과 도보 순례를 갈 예정인데 속옷 서랍엔 해진 팬티만 그득했기 때문이다. 순례 일수만큼의 팬티를 챙기는 대신 가방 무게를 줄일 수 있게 몇 장의 팬티만 매일밤 손빨래해 돌려 입을 계획이었다. 잠들기 전 머리맡에 널어놓은 팬티가 새것은 아니더라도 멀끔해야 하잖아. 그런데 순례를 앞두고 건조대에서 팬티를 개다 보니 지금까지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부분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구멍, 터진 고무줄, 뜯어진 심리스 접착라인 등 자세히 볼수록 가관이었다. 어쩐지 너덜너덜한 팬티는 남자보다 여자한테 보여주기가 더 싫다. 같은 방에 묵을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야 많지만 역시 해진 속옷은 안 되겠다. 연애 안 한 지 제법 오래되었구나 싶었고, 또 이 정도면 제법 환경에 이바지한 것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결국 새 팬티를 사기로 했다. 브라 쪽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두 번만 '팬티'를 검색해도 알고리즘이 인스타그램과 포털사이트에 온갖 속옷 광고를 배달해 준다. 요즘은 멋진 속옷 광고가 많다. 멋진 속옷을 입은 멋진 여자들도 많아. 다들 많이 벗고 다녀라. 나는 벗은 여자들이 좋다. 뭐, 벗은 남자들도 좋다. 몸 좀 드러낸 게 별 일 아니라고 여기는 태도가 좋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사람들이 내 몸을 위아래로 훑는 게 싫었다. 어릴 때부터 키가 또래보다 훌쩍 컸더니 평생을 위아래로 훑어진다. 큰 키가 좋아진 건 오래되었지만 몸을 훑는 시선은 여전히 당황스럽다. 상대의 눈빛 앞에선 내 몸이 싫어진다. 남초 커뮤니티만 들락거리는 남동생은 언젠가 함께 걷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근데 사람들이 누나를 진짜 많이 쳐다본다. 남동생은 평생 당해본 적 없는 시선이었으리라. 나는 내가 문신을 가득해버린 이유를 여기에서 찾기도 한다. 문신 때문에 쏟아지는 눈빛은 훨씬 견딜만했거든. 그러니 다들 벗고 다니자. 징그러운 시선이 사방으로 흩어다가 결국 갈 곳을 잃게. 밋밋한 몸, 쭈글한 몸, 튼튼한 몸, 뚱뚱한 몸, 잘린 몸, 작은 몸, 마른 몸, 큰 몸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면 좋겠다. 그래서 결국엔 다 별것 아니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다들 어떤 기준으로 속옷을 고르는 걸까.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속옷 구매는 어렵다. 선택지가 많아져 더 그렇다. 어릴 땐 엄마가 사주는 걸 입으면 됐다. 이제 직접 구매하려고 보니 세상에나 종류가 너무 많다. 브라의 경우 스포츠 브라, 쿨 드라이 브라, 웜 브라, 브라렛, 노와이어 브라, 레이스 브라, 누드 브라, 니플패치, 심리스 브라, 브라탑 등 카테고리만 따져도 이만큼이다. 속옷 브랜드 하나당 브라 종류가 서른 개에서 오십 개는 된다. 핸드폰 화면으로 들이밀어진 속옷 브랜드는 열다섯 개 정도. 그중 제품과 사이트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대여섯 개 정도의 사이트를 들락거리면 거의 백오십 개에서 삼백 개의 브라를 훑게 된다. 여기서부터 브라 이상형 월드컵 128강이 시작된다. 레이스가 과한 것은 상의를 매치하기에 불편하므로 제외한다. 젖꼭지가 튀어나올 수 있으므로 패드 면적이 너무 작은 것도 제외. 으슬으슬 떨고 싶지 않다면 겨울에 여름용을 피하고, 속에서부터 쪄죽고 싶지 않다면 여름엔 겨울용을 피해야 한다. 도보 순례 때 손세탁 후 빨리 건조되길 기대하려면 순면보다 나일론과 폴리우레탄이 함유된 제품을 골라야 한다. 어깨끈이 너무 얇으면 피부를 조이고, 넓으면 넥라인이 파진 옷을 입을 수가 없다. 요즘 유행하는 심리스 브라는 몸에 자국을 거의 남기지 않는 부드러운 재질과 마감을 선보이지만 그만큼 빨리 너덜너덜해진다. 아직까진 직물을 서로 이을 때 봉제보다 더 탄탄한 방법이 개발되지 않았다. 봉제 마감 브라는 그나마 견딜만하지만 팬티의 경우 서혜부를 깊게 조여 답답하다. 심리스도 봉제도 아닌 팬티를 찾다가 드로즈를 몇 년 입었지만 그마저도 좋은 제품을 꾸준히 생산하는 브랜드를 찾지 못했다. 튼튼하면 두꺼워 답답하고, 얇으면 허접해 금방 터진다. 새로 생긴 속옷 브랜드에는 가짜 후기가 많고, 오래된 브랜드는 제품이 끔찍하게 촌스럽다. 언제쯤 고민없이 재구매할 속옷 브랜드를 찾게 될까. 죽기 전에 그런 속옷을 찾을 수 있을까.
 
 할 일도 많은데 속옷 따위에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하면 조급해진다. 언젠가 괜찮은 팬티를 찾았으니 좀 보내주겠다는 엄마의 제안을 덜컥 수락한 것도 그런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택배 상자를 열고 나는 기함했다. 오리와 물방울, 꽃무늬 삼각팬티가 가득했던 것이다. 부모 눈에 자식은 평생 아기라지만 이 정도인가 싶을 정도였다. 차라리 색이라도 밝으면 귀여울 텐데 썩은 케이크에 핀 곰팡이 같아서 도무지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팬티가 마음에 안 든다고 투정 부리기엔 너무 어른이 되지 않았냐, 팬티를 어디에 자랑할 것도 아닌데 뭐 어떠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그 팬티를 입을 때마다 느끼는 치욕은 갈수록 강해졌고, 순례를 앞둔 지금 최고조에 달해 결국 새 팬티 두 장과 새 브라 한 장을 결제해 버렸지 뭔가. 환경을 지키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떠나는 도보 순례를 앞두고 새 옷을 구매하는 인간이 되고 말았지 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