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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250302 불완전한 인간의 동반자, 불안 본문
의외로, 나도 미래를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낮에는 벤치에서 졸다가 저녁엔 화장실 한 칸에서 잠이 드는 노인의 팔뚝에 익숙한 문신이 새겨져 있는 장면 같은 걸 떠올리면 잠이 번쩍 달아난다. 노년의 빈곤이 두렵다. 망가지는 몸만으로도 괴로울 텐데, 그 몸이기에 가속될 빈곤은 더욱 견디기 힘들 것이다. 이십 대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단지 젊다는 이유로, 멍청하고 무례하던 나를 써준 고용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혹은 젊다는 이유로 밥이나 술을 턱턱 사는 인생 선배들도 있었다. 젊음은 보기에도 좋고, 어울리기에도 좋다. 심지어 체취도 좋다. 수렵 사회의 우두머리는 청년이고, 농촌 사회의 우두머리는 노인이었다. 사냥은 힘으로 하고, 농사는 지혜로 지었다. 사회 구조의 변화로 노인의 지혜가 쓸모를 잃은 한국은 청년의 시장가치를 유독 과대평가한다. 노인의 쓸모를 지금부터 연구해 놔야 미래의 내가 혜택을 볼 텐데, 요즘은 청년의 쓸모도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소득이 높고 인구 재생산에 기여하는 게 청년의 가치라면 이렇게 실업률이 높고 출산율이 낮은 사회에서도 여전히 그 기준이 유효한지, 그 기준으로 따지면 가치 없을 대다수는 어떻게 사회 구성원의 역할을 해야 하는지, 전반적 사회 구조에 대한 인식을 다시 세워야 하는 게 아닌가요. 범시민사회대개혁이여 어서 오라. 여하튼, 지금 아무 노력 없이 얻은 호감과 소득이 나이가 들며 점차 손에 담은 물처럼 빠져나갈 때, 그 야속함과 고독과 빈곤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대로라면 사회복지사에게 너무 많은 일을 떠넘기게 된다. 지금부터 사회복지사들과 친하게 지내던지, 혹은 악착같이 벌어놓던지. 벌 수 있을지 없을지는 차치하더라도...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걸 보면 내가 우울한 거지. 혹은 불안한 거지. 이럴 때 달력을 보면 기가 막히게 PMS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나는 최악의 미래를 선명히 상상하며 불안을 키워간다. 이제껏 뭐 하고 있었나, 좋은 날은 다 끝났다며 가라앉는다. 그러다 평소에 그리 찾지도 않던 떡볶이가 당장 먹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간절해지고, 기어이 그걸 찾아 입에 넣고 나면 다음날 생리가 시작된다. 고통이 마음에서 신체로 옮겨간다. 그럴 땐 비상약통에서 타이레놀과 초콜릿을 꺼내면 된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그 기간만 무사히 넘기는 데 급급해왔는데, 오늘은 한 번 마주 앉아볼까 한다. 왜냐하면 이 불안이라는 것이 아무리 PMS 증상 중 하나라고 해도 근거가 아예 없는 발상은 아니고, 오히려 평소에 바빠 미뤄둔 실존적 고민을 차분히 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니까. 대체로 나는 내 생각을 안 한다. 배고프다, 배 아프다, 졸리다 같은 욕구에 대한 것 말고, 미래의 내 걱정 같은 것은 잘하지 않는다. 당장 오늘 저녁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도 알 수 없는데 미래에 대한 적중률은 훨씬 떨어지니까. 게다가 내 걱정은 태어날 때부터 외주를 맡겨놓았다. 내 걱정을 하느라 잠이 안 올 때가 있다는 엄마가 있으니 나는 걱정을 덜 해도 된다. 중요한 것은 걱정의 총량보다 질이니까, 나까지 할 필요는 없는 거지. 그렇지만 가끔은 그 주체가 스스로를 고민해야 하는 거니까. 의무적으로다가 제대로 걱정을 해보자고.
미래의 불안은 현재에서 기인한다. 씨앗의 이름은 '이대로 가다간...'이다. 씨앗은 통장 잔고, 인간관계, 건강검진결과 등을 퇴비 삼아 잠들어 있다가 따뜻하게 불어오는 한숨에 깨어나 싹을 틔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게 있다. 불안도 잘 키워놓으면 쓸만하더란 것이다. 뿌리를 튼튼히 내린 불안은 폭우 같은 인생의 사건에도 토양이 유실되지 않게 땅을 지키고 순환을 돕는다. 합리적 불안은 삶의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훌륭한 근거가 된다. 또한 일어날 법한 최악의 상황을 수백, 수천 번 시뮬레이션해 보는 것은 엔드 게임의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차선책이라도 찾을 수 있는 요긴한 방법이다.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과거보다 자구책을 준비할 수 있는 미래를 시뮬레이션하는 편이 현명하다. 그러니 주기적이고 절망적이며 지겹고 끈질긴 이 불안과 차라리 절친이 되고 아주 한번 질펀하게 놀아보자고...
언젠가-정말 언제인지 모르겠다- 백권야행 독서모임에서 읽었던 『불완전한 인간 Homo Imperfectus』에 흥미로운 문장이 있다. 저자 마리아 마르티논 토레스는 의학박사 출신의 인류학자로, 인간이 가진 모순과 불완전함(수면 장애, 노화, 암, 식이 장애, 폭력 등)이 오랜 진화 속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균형 잡힌 시선으로 이야기한다(여기서 '균형 잡힌 시선'이라는 뜻은, 마리아가 의학적, 인류학적 지식을 설명하기 위해 문학적, 역사적 비유를 효과적으로 사용했음을 뜻한다).
삶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자신을 보호하는 것과 지나치게 걱정하는 삶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종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하지만, 불안 장애를 겪는 사람들의 수가 상당히 많다.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범불안 장애와 공항 발작 그리고 공포증을 겪었거나 겪게 될 것이다. 불안은 우리 시대의 특징이며,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또는 환경적 변화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대의 전염병이다. p.78
마리아는 지능지수가 높은 사람들이 정서 및 불안 장애와 신체적 방어 시스템 장애로 고통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를 인용하며, 당신의 불안은 높은 지능 때문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하이퍼 브레인Hyper brain 소유자들이 보이는 과흥분성Hyperexercitability에 대해 읽다 보니 테드 창의 단편 소설 「이해」의 주인공 리언이 떠올랐다. 리언은 고지능자가 겪는 정신적 고조 상태 속에서도 신체 기능을 강화하는 훈련을 했기에 자신의 변화를 감당할 수 있었지만, 현실 속 고지능자들은 정신적 과흥분이 신체적 과흥분으로 이어져 면역 체계의 오류를 겪거나 극한의 불안 장애를 겪게 된다. 직간접적 지인인 두 명의 고지능자가 공통적으로 식이 장애와 불안 장애를 겪고 있음을 떠올리니, 그 둘에게 고지능과 불안, 저지능과 행복 중 무엇을 택하고 싶은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으나 이런 질문 자체가 저지능자의 해맑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에 닥치기로... 그러나 그 두 명이 자신의 고지능을 무의식중에 자랑스러워했기 때문에, 아마도, 괴롭더라도 지금의 자신과 잘 살아보려고 하지 않을까. 그래주길 바랄 뿐이다.
아, 지능! 그것은 우리의 빨간 구두이자 욕망이며 커다란 고통이다. 인간종의 진화 과정에서 지능은 중요한 생존 전략 역할을 했지만, 때때로 회전 속도를 과도하게 올린 엔진과 같다. 인간은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된 정교한 기계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지만, 이 기계는 너무 훈련이 잘된 나머지 때로는 문제를 먹어야만 작동하는 작은 괴물이 된다. p.86
큰 두뇌에도 부작용은 있다. 인간은 뇌 기능에 크게 의존하는, 대뇌가 발달한 종(신체 크기에 비례해 매우 큰 뇌를 지님)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취약하다. 우리는 그런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종은 걱정하기 위해 태어났고, 현재 당면한 위험뿐만 아니라 미래의 위험, 우리뿐만 아니라 자녀와 자녀의 자녀를 기다리고 있는 만일의 사태를 예측하기 위해 태어났다. ··· 높은 추상화 능력을 갖춘 인간종은 우리 자신을 파괴하고 '파괴할 수 있는' 비상사태와 위험을 인식한다. p.89
그러니까 우리는 큰 뇌를 가진 죄로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할 능력을 가지게 되었고, 생각할 능력이라는 건 불안할 능력이라는 말과 같은 거지. 내 불안은 자연스럽고, 타당하고, 원하진 않았지만 주기적이다. 이 정도면 예측 가능하고, 대처 가능한 수준의 불안이지. 이 불안이 없었더라면 나는 직장에서, 집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전히 노년의 빈곤과 주거 문제가 날 불안하게 만든다. 아직 출산 경험이 없는데, 계획도 없다. 이 무계획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나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는 것, 남기지 않는 것 둘 다 선택이다. 도통 후회라곤 모르며 살아왔지만 후자의 선택은 모처럼 후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선택이 내가 원하는 미래에 부합할까. 불안하다. 하지만 좋은 고민이다. 과정은 괴롭겠지만 결론은 어떻게든 내 미래에 보탬이 된다. 일단은 집안을 청소하고, 밥을 잘 먹고, 몸을 잘 닦자. 깨끗한 공간에 깨끗한 몸으로 앉아있으면 문제가 반은 해결된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한 달 뒤 또 PMS에 시달릴 내게 두고두고 읽을거리를 여기에 남겨둔다. 한 달 뒤의 다정, 오직 너만이 우리 문제의 주체다. 가끔 무속신앙에 기웃거리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만, 노년의 빈곤을 걱정한다면 그 대신 밥이나 잘 먹고 운동이나 등록할 것. 한 달 뒤에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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