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2025.5.15-24 대만 체류 - 탐조편 🦜🔭 ① 본문

2025 긴개

2025.5.15-24 대만 체류 - 탐조편 🦜🔭 ①

긴개 2025. 5. 24. 14:35


어느 지역에 가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섬나라에 가면 그곳의 생물 고유종을 봐야 한다. 대만 역시 고유하게 진화한 조류종이 많다. 게다가 아열대 지역 조류의 깃털색은 배스킨라빈스31처럼 아름답다. 대만 출장이 결정 난 뒤 대만의 역사소설, 현대소설, 인문학, 출판문화 등을 몇 권 사서 천천히 읽었지만 조류도감은 현지에서 구매하기 위해 꾹 참았다.

일주일 간의 출장-반핵아시아포럼 NNAF-이 끝난 바로 그날 저녁 TWBF, Taiwan Wild Bird Federation에 들렀다. 새 도감을 사고, 굿즈가 있다면 함께 살 생각이었다. 큰 기대 없이 방문한 그곳에서 우리는 Scott, Allen과 선 채로 두 시간을 떠들었다. 그것도 서로 말할 차례를 노리느라 눈치를 보고 손까지 들어가면서! 우리가 방문한 첫 한국인이라고 해서 뿌듯했지만 나중에 이화대 조류충돌 문제를 다루는 학생들이 먼저 방문했던 것이 떠올랐다고 해서 2등에 만족하기로.

일주일 넘게 머무르며 친절하지 않은 대만인을 본 적이 없긴 했지만 이들도 다정하긴 마찬가지였다. 더 오래 머물렀다간 사무실에 있는 모든 걸 선물할 것 같다며 이만 가보겠다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새를 좋아하는 사람끼리만 나눌 수 있는 다정도 있었으나, 트럼프가 두 번 대통령이 된 미국 사람인 Scott과 계엄령을 40년 겪은 대만 사람 Allen, 그리고 계엄령 6시간을 겪은 한국 사람인 우리가 서로의 처지를 놀리기가 얼마나 좋았던지. 한국 시민들이 6시간 만에 계엄령을 해제했다는 뉴스에 Allen이 정말 놀랐다고 했다. MAGA모자를 쓰고 다니는 한국 어르신들에 대해 이야기하니 Scott이 정말 수치스러워했고, 젊은이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니 더욱 경악했다. 미국, 대만, 한국의 유사하면서도 제각기 만만치 않은 정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 같았다.

반핵아시아포럼 NNAF에 다녀왔다고 하니, 반핵 이후 대체에너지 수급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재생에너지 중에서도 특히 태양열에너지 시설이 기존 조류 서식지와 충돌해 대만 전역의 조류 협회들이 해결 방법을 요구하는 상황이라고. 오로지 인류만을 위해 사용하는 에너지 때문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탐조만 해도 저절로 알게 된다. 또한 기후 변화로 핀둥 등 남쪽 지역의 조류종이 타이베이에서 발견되기도 한다니 이 모든 위기는 지구 곳곳 닥치지 않은 곳이 없다는 거네. 에너지 소비도 결국 줄여나가야 하고, 발전소 건설과 가동의 한계도 더 널리 알려져야 하는데 갈길도 깨달음도 천 리 밖이라.

Scott과 Allen은 기꺼이, 열성적으로 탐조 스팟을 짚어줬다. 물론 타이베이 식물원이나 다안 공원, NTU도 좋긴 하나, 거기에서는 common bird만 볼 수 있을 거라고. 되도록이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희귀한 새들을 보라고. 덕분에 찾아간 Menghuan Pond에서 대만 국조 Taiwan Blue Magpie 등을 보았고 멋진 경치도 만끽했다(희귀한 새를 보기엔 우리가 너무 아마추어였다). 그래도 앞으로는 대만 탐조는 겨울이 제철이라는 사실 잊지 않기로. 5월 말의 대만은 타이베이나 핑둥이나 입이 벌어지게 덥기는 매한가지였다(물론 타이베이가 핑둥에 비할 바는 아니다). 조금만 걸어도 얼굴이 땀으로 젖는 날씨에 쌍안경과 디지스코핑 장비, 도감, 물과 간식, 카메라 등이 가득한 백팩을 이고 지고 돌아다니려니 평소보다 빨리 지쳤다. 대만 탐조는 절대 여름에 하지 마시오. 이제는 한국도 매한가지이지만.

대만과 한국의 탐조인 세대 차이부터 TWBF가 기업과 건강한 공생 관계를 맺는 방법, 새가 그렇게 많은 나라인데도 야생 조류에 대한 대만 사람들의 저조한 인식, 역시나 새 충돌 문제, 한국의 유튜버 새 덕후까지 이야기에 틈이 없었다. TWBF 굿즈가 있으면 사고 싶었지만 매년 현장을 돌며 리포트를 발표하는 연구자들이 굿즈 만들고 홍보할 시간이 어디 있나. 아쉬워했더니 자꾸 리포트를 챙겨주는 친절한 사람들…

타이베이에서는 가볍게 도시 탐조를, 그리고 타이중에서 대설산 탐조를 즐기려 했으나 아마추어끼리 차 없이 하루이틀 만에 돌아볼 곳이 아니라는 말에 단박에 대설산은 포기했다. 대만 탐조인들 역시 새를 보고 있으면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오고 자기가 찍은 새 사진과 발견 빈도 등을 공유해 준다. 그나저나 언젠가 탐조하러 대설산 갈 계획이라고 하면 다들 그렇게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이 자식 뭘 좀 아는구나 하고.

지금까지 취미에 큰돈을 쓰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좋은 카메라와 렌즈 구매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싼 비행기 타고 탄소 대량 배출하며 대만까지 와서 아이폰 13 미니로 디지스코핑한 열악한 기록을 남기고 있으려니 이게 무슨 미련한 짓인가 싶고. 실력은 초보인데 비싼 렌즈가 가당키나 하냐고 생각했지만, 눈앞에서 날아다니는 새를 아이폰 카메라로 찍는 건 확실히 요령 부족이다. 그러나 제대로 촬영하겠다고 마음먹기 시작하면 그 결과물의 분류와 기록까지 함께 챙겨야 할 텐데 그럴 시간이 있는가? 새를 보는 기쁨과 기록하는 기쁨의 차이는 무엇인가. 즐겁고 괴로운 취미 탐조. 여기까지 읽은 당신도 꼭 한 번 도전해 보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