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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ATV(All-Terrain Vehicle), 이른바 사륜 오토바이 아래에 깔리는 건 상상만큼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저 얼얼하여 주위를 분간하기 어렵고, 어딘가 욱신거리기는 했으나 그것이 등인지 엉덩이인지 알 수 없었다. 양 손바닥과 얼굴에 모래가 폭탄 파편처럼 박혀있었다. 까슬하고 텁텁한 모래는 혀에도 덕지덕지 붙어있었는데 입을 다물면 삼킬 것 같고, 누운 채로 침을 뱉었다간 얼굴에 그대로 묻을 것 같았다. 입을 꼭 다물지도 벌리지도 못한 채 버둥거리려니 어디선가 아빠가 쏜살같이 날아와 내 몸을 덮고 있던 거대한 사륜 오토바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마치 내가 그 시간에 그 위치에서 전복될 것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빠른 처치였다. 이후 어떻게 빨리 달려올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느닷없이..
우리 개는 길에서 함부로 눕지 않는다. 집이라면 어디서나 털썩 웅크려 따뜻한 몸을 돌돌 말고 있지만 밖에서는 어림도 없다. 오래 걸어 피곤할 때는 잠깐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다소곳이 앉지만 거기까지다. 집에서처럼 무방비로 누워 힘을 빼고 있는 모습은 도통 보기 쉽지 않다. 이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개는 집에서도 부드러운 천이 깔린 조용한 침실에 가서야 천천히 네 다리를 곧게 편다. 낯선 곳에서 쉽게 움찔움찔 놀라는 이 개 때문에 커피를 다 마시기 전에 카페를 나오게 될 수도 있다. 옆 테이블의 개는 길에서 태어나고 자란 듯 아무 바닥에나 넓게 누워 눈을 감고 있다. 반면 우리 개는 묵직한 컵이 테이블 위에 닿는 소리, 사람들이 몸을 움직이며 의자를 끄는 소리, 문이 갑자기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 절대 익숙해..
방학을 맞은 소윤이가 서울에 놀러 오겠다고 한다. 너 혼자? 너 혼자 고속버스 표를 예매하고 버스를 타서 서울에 와가지고 지하철로 갈아탈 수 있어? 소윤이는 코웃음을 친다. 이제 소윤이는 애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자식이 글쎄 18살이 된 것이다. 아니 너 엊그제만 해도 중학교 1학년이었잖아. 중1이 고2가 되기까지 억겁의 시간이 흘러야 했을 텐데, 그걸 겪어냈단 말이야? 덜컥 걱정이 된다. 청소년 소윤이가 살아낸 4년은 내가 살아낸 4년보다 몇 배는 촘촘하고 치열했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초당 24 프레임에 그쳤던 어느 날이 소윤이에게는 60 프레임 이상의 선명한 순간이었을지도, 그리고 그런 날들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서로가 동일한 시기를 살고도 다른 밀도의 경험을 ..
당시만 해도 전자제품을, 그것도 고가의 것을 사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용던*에 가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 얼굴도, 사는 곳도 모르는 사람에게 인터넷으로 비싼 물건을 주문한 뒤 그것이 멀쩡한 상태로 배송되길 기대하는 건 그야말로 어디 가서 사기당하기 딱 좋게 순진한 바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 상식적인 구매자라면 내 발로 찾아가서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에 들고 와야 했다. 적어도 우리 아빠 생각엔 그랬다. 아빠랑 단둘이 집 아닌 곳으로 간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런 일이 굉장히 드물었기 때문에 조수석에 탄 나는 어색해하면서도 조금 들떠 있었다. 우리는 용산전자상가에 노트북을 사러 가고 있었다. 아빠는 항상 동생에게는 최신 핸드폰을 사주고 나는 공짜폰을 쓰게 했다. 남자는 만년필..
직장 동료의 손과 발에 작은 물집들이 잡혔다. 증상을 검색해보니 한포진과 비슷하다. 통증이 심하지 않아 대상포진은 아닐 것이다. 한포진의 발병 원인은 확실하지 않다. 의사들도 다한증이나 스트레스, 유해물질 노출 등으로 이유를 짐작할 뿐이다. 몸의 표면에 나타난 이 투명한 물집들은 무슨 신호일까? 일을 잠시 쉬고 왕창 놀면 스트레스가 풀려 깨끗이 낫는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혹은 손에 물 묻히지 않게 해 줄 노예를 구하라는 계시 인지도 모른다. 몸속의 무언가가 정상적인 순환을 방해하여 피부에 경고를 남기고 있다. 애인은 한동안 요추 추간판 탈출증에 시달리며 부쩍 예민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까칠해지거나 표정이 매서워지지는 않는다. 그저 시름에 잠겨 청초하고 아름다운 웃음이 줄어들고 있다. 허리에서 느껴지는 ..
숨 막히게 괴로워 문득 인천공항에 간 적이 있다. 공항은 시간 때우기에 훌륭한 곳이다. 우선 구석구석 깨끗하고 쾌적하다. 인기 프랜차이즈 음식점들이 마구 모여있다. 많은 인파에 비해 소음은 견딜만한 수준이다. 어디에선가 시끄럽게 터져나온 소리들이 넓고 높은 공항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우우웅 줄어들어버린다. 피곤하면 어디든 털썩 앉아 쉴 수 있다. 화장실도 발길 닿는 곳마다 준비 완료. 쓰다보니 인천공항이기에 이런 장점을 꼽을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다. 이곳에서 사연 없는 눈빛은 없다. 급하게 출국장을 찾느라 허둥대면서도 들뜬 마음으로 발그레한 얼굴들이 우르르 사라지고 나면 잠든 아이를 업고 지쳐 말도 잊은 젊은 부부가 지나간다. 각양각색의 캐리어들이 요리조리..
헛소리를 나눌 상대가 크게 줄었다. 위험하다. 이러다간 머리가 점점 굳는다. 샌드위치 가게 습격 계획 세우기, 나만의 사이비 종교 만들기, 직접 지은 속담 대결하기 등의 중대사가 논의되지 않은 채 쌓여간다. 헛소리의 주요한 효능을 이해하는 현인과 사귀고 싶다. 하루 30분 정도 헛소리를 하면 스트레스 해소, 창의력과 논리력 향상, 그리고 임기응변 능력도 키울 수 있다. 수십만 직장인들이 지겹도록 겪어왔던 딜레마를 이제야 맛보고 있다. 바로 돈을 버는 대신 포기해야 하는 것이 생긴다는 이다. 모두들 이미 한바탕 떠들어 댄 ‘직장인의 고뇌’ 시리즈. 오랜 한량 생활 끝에 이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되어 아주 감회가 새롭고 가슴이 답답하다. 직장인으로서의 나는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의 바..
고독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는 내가 감당하기 힘든 스스로의 변덕 중 하나이다. 혼자가 싫다. 혼자 일어나 혼자 잠들고 싶지 않다. 날 위해 요리해 혼자 먹고 직접 치우고 싶지 않다. 혼자서도 외식과 쇼핑은 곧잘 하지만 역시 한 마디 내뱉고 싶어질 때가 있다. “옳게 된 자본주의라면 이 거지 같은 음식을 내가 먹어줬으니까 돈은 내가 받는 게 맞지 않아?”라던지 “이 옷이 나한테 이 정도로 잘 어울리면 디자이너가 그냥 한 벌 줘야 하는 거 아냐?”같은 말을. 그때마다 받아쳐줄 상대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나 그 역할을 맡아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혼자이긴 싫은데 그렇다고 함께이고 싶은 사람도 없다. 가족들이 있는 집에 가면 불면증에 시달린다.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느니 차라리 혼자 껌을 씹겠다. ..
식당에서 주문한 메뉴가 나오기 전까지 무엇을 하며 기다려야 좋을지에 대한 속 시원한 답을 오랫동안 찾아왔다. 카페라면 한결 수월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곳만의 재미있는 인테리어를 하나하나 뜯어볼 수도 있고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뒤적거려도 된다. 애초에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각오를 하고 가는 곳이기도 하고. 그러나 오로지 식사를 위해 방문한 식당에서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주어지는, 짧다면 짧고 (어색한 사람들과 함께라서)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뭘 하면 좋을까. 함께 온 이들을 위해 수저를 놓아주고 컵에 물을 따라 나눠주며 한바탕 부산을 떨고 난 뒤에도 여전히 음식 소식은 요원하다면? 나는 그 답을 에밀 출판사의 『놀라운 리얼 종이접기 2 - 하늘을 나는 생물 편』에서 찾았다. 사각주머니*를 미리 접어..
엄마가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달라고 했다. 사실은 그 말을 미처 꺼내기도 전에 나는 알았다. 부름의 의도에 따라 자신의 목소리 톤과 억양이 세분화되어 있다는 걸 엄마는 몰랐을 것이다.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자마자 그 음파가 뒤이어 주문하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나는 인형술사가 일으킨 목각인형처럼 벌떡 일어나 그대로 현관문으로 뛰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 잡힐 것이 뻔했으므로 한 번에 세네 칸씩 계단을 펄쩍펄쩍 뛰어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으로 빙글빙글 휘감긴 통로 위에서 엄마가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소리쳤다. 야 이 망할 년아 - - - - - 위 기억은 중학생 때의 것으로, 그때의 나는 어떻게든 남이 시키는 것을 하지 않으며 살고자 노력했다. 지금도 직장에 다니고는 있지만 고분고분시키는 대로 따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