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0718 월 / 2009년 5월 23일에 산 노트북 / 긴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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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8 월 / 2009년 5월 23일에 산 노트북 / 긴개

긴개 2022. 7. 19. 00:58

                                   

 

 

 

 

 

 

 

 

 당시만 해도 전자제품을, 그것도 고가의 것을 사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용던*에 가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 얼굴도, 사는 곳도 모르는 사람에게 인터넷으로 비싼 물건을 주문한 뒤 그것이 멀쩡한 상태로 배송되길 기대하는 건 그야말로 어디 가서 사기당하기 딱 좋게 순진한 바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 상식적인 구매자라면 내 발로 찾아가서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에 들고 와야 했다. 적어도 우리 아빠 생각엔 그랬다. 

 

 아빠랑 단둘이 집 아닌 곳으로 간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런 일이 굉장히 드물었기 때문에 조수석에 탄 나는 어색해하면서도 조금 들떠 있었다. 우리는 용산전자상가에 노트북을 사러 가고 있었다. 아빠는 항상 동생에게는 최신 핸드폰을 사주고 나는 공짜폰을 쓰게 했다. 남자는 만년필로 서명해야 한다며 동생에게 가끔 고급 만년필도 선물했다. 동생은 둘 다 금방 잃어버렸다. 나는 책 읽기도, 글 쓰는 것도 좋아했지만 한 번도 만년필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만년필로 글씨를 쓰면 뭔가 굉장한 걸까. 궁금했지만 그 뒤로도 만년필은 동생에게만 주어졌다. 그런데 이번엔 무슨 바람이었는지 웬일로 아빠가 내게 노트북을 사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것도 동생보다 먼저! 

 

 아빠는 이런 곳에서는 잘못 걸리면 덤터기를 쓰게 되니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도 천천히 여기저기에서 가격을 비교해보고 제일 저렴하고 사은품을 잘 챙겨주는 곳에서 현명하게 구매해야 한다고 했다. 절대 점원이 처음에 추천하는 제품을 덥석 물어 바로 구매하면 안 된다고도 했다. 이 엄중한 경고는 점점 어리석은 구매자로 대표되는 인물인 나를 꾸짖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들뜬 마음으로 듣고 있던 나는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괜히 따라 나왔구나. 노트북이 그렇게 필요하지도 않은데 난 뭣하러 주말에 아빠랑 이렇게 어두침침한 델 왔을까. 독서실 간다고 하고 친구들이랑 놀러 갈 걸 내가 미쳤지, 미쳤어.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용던을 빠져나온 내 손에는 삼성 노트북이 들려있었다. 제일 처음에 들어간 매장에서 처음 만난 직원이 추천한 노트북을 샀다. 발품 파는 현명한 소비자가 되라고 그렇게 화를 내던 우리 아빠가 사준 것이었다. 용던에 들어가자마자 마주친 것은 도시바** 매장이었다. 진열된 노트북 디자인이 꽤 귀여웠으나 아빠는 일본 건 안 된다며 들어가 보지도 않고 옆 삼성 매장으로 향했다. 그냥 어떤 제품이 있나 한 번 둘러보기만 하려 했던 것인데 마침 다가와 말을 건 직원이 있었다. 그는 이른바 용팔이로 불리던 전자상가 직원들의 사기꾼 같은 이미지와는 딴판으로 피케 셔츠에 안경을 쓴 단정한 모습이었는데 말투도 사근사근 친절했던 탓에 설명이 시작되자 아빠는 바로 그에게 빠져든 눈빛이 되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한동안 설명을 듣더니 별 이견도 없이 그가 추천한 제품을 그대로 구매해버렸다. 매장을 나오며 내가 아빠를 빤히 쳐다보자 아빠는 사뭇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걔 인상이 좋드라” 

 

 고된 노트북 구매를 마친 뒤 우리는 근처 식당에 들렀다. 그날은 2009년 5월 23일 토요일이었다. 별 말도 없이 식사를 하던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던 뉴스 속보에 잠시 숟갈을 내려놓았다.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잠시 혀를 찼다. 허, 참- 에잉. 하, 참. 돌아오는 길엔 멀미가 날 것 같았다. 

 

 그때 노트북은 내게 필요 없었다. 어디에 써야 할지도 몰랐다. 아마 문서 몇 번 편집하다 말았을 것이다. 그 무겁고 답답한 기계는 아직도 가지고 있다. 다시 켤 수는 없겠지만. 



 

 

 

*용산던전의 줄임말. 용산던전은 용산전자상가의 별명이다. 구조가 던전처럼 복잡하고 용팔이로 불리는 전자상가 직원들이 던전의 몬스터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TOSHIBA. 일본 전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