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Brazilian
- 성북동희영수
- post-treeproject
- 전시
- 긴개
- 단편소설
- 긴개만화
- 2024길위의인문학
- latin jazz
- 성북동글방
- 드로잉
- 서평
- 에로잉
- soul
- 희영수
- 긴개의사자성어
- (null)
- 에세이
- 길위의인문학
- bossa nova
- 사자성어
- 동시대의친구나무새롭게사귀기
- 라현진
- 버추얼리얼리티
- MPB
- 성북동글방희영수
- 성북동
- 영화
- 글방
- 에코샵홀씨
- Today
- Total
목록긴개 (81)
성북동 글방 희영수
허리에 뜨개옷을 두른 가로수들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을 둘러싸고 노란 잎을 흩뿌리고 있었다. 유명한 덕수궁 와플집 옆으로는 스무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줄을 섰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달콤한 냄새에 놀라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그 치열하고 침 고이는 광경을 발견한다. 승자들은 따끈한 와플이 든 봉투를 쥐고 서둘러 자리를 뜬다. 포근한 날씨에 몸이 풀린 나들이객들이 덕수궁 담벼락 앞에서 한 컷, 노란 단풍나무 아래에서 한 컷, 예쁜 뜨개옷을 부여잡고 한 컷 바지런히 셔터를 누른다. 이렇게 다들 길을 막고 서있으면 빨리 미술관으로 갈 수 없다. 사람들을 일렬로 줄 세워 집에 돌려보내는 상상을 하고 있었는데 뜨개옷을 두른 가로수 허리를 붙잡고 한쪽 발 끝을 애교스럽게 든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할머..
집에 돌아와 보니 문고리에 종이 가방이 걸려있다. 가방 속엔 새 양말 다섯 켤레가 들어있다. 아마도 자주 마주치는 마을 할머니 중 한 분일 것이다. 새로 이사 온 동네에서 또래 친구는 사귀지 못했지만 매일 마을 입구 정자에 앉아 하늘 구경하는 할머니들과는 꽤 반가운 사이가 되었다. 내 강아지 란마를 발음하기 어려워 아무렇게나 내키는 대로 부르는 할머니들. 저번엔 세주네* 할머니가 란마를 알콩이라고 불렀다. 도대체 란마가 어떻게 알콩이가 되었지? 생각하면 웃음이 나와 그 뒤로는 나도 종종 란마를 알콩이라고 불렀다. 부르다 보니 역시 란마보다는 알콩이가 입에 착 감긴다. 이전 동네에서도 그런 할머니들이 있었다. 집 앞 평상에 매일 식사 시간 전후로 모여 수다를 떨고 마늘을 까고 부침개를 노나 드시던. 그러나..
열여덟 살짜리가 쓴 진로계획서 그 종이 쪼가리 어느 구석에 미래에 대한 구속력이 있었으랴. 사회생활 데이터가 부족한 당시의 상상력으로는 공무원/회사원/선생님/자영업 이외의 직업군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 외의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번다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미술대학에 가겠다는 결정은 상기한 직업의 범주에서 벗어나 마치 제3세계로 망명하겠다는 선택처럼 비장하면서도 무책임한 각오가 필요했다. 내가 미술학원에 매달 45만 원가량을 꼬박꼬박 납부하며 미지의 미래를 위해 오른쪽 어깨 근육을 혹사하는 동안 어떤 친구는 뜬금없이 발레에 매진하겠다고 했다. 뜬금없기로서는 내가 미술대학에 가겠다고 선언한 것과 피차일반이었을지 모르나, 아무것도 모르던 고2의 눈에도 발레를 배워 돈을 버는 ..
창 밖으로 내리는 비에는 차가운 악의가 있다. 나무 한 그루라도 주저앉혀야 속이 풀릴 것처럼 쏟아지고 있다. 이따금 무거운 빗줄기가 바람에 떠밀려 꿀렁 휘어진다. 깜짝 놀란 가로등 불빛이 함께 들썩인다. 함께 사는 강아지는 왜 밤 산책이 미뤄지는지 충분히 안내받지 못했다. 답답한 표정으로 발치에서 조바심을 내다가 내 허벅지를 벅벅 긁는다. 킁킁 코를 묻히며 참견하는 데도 나갈 기미가 없자 풀썩 드러눕는다. 답답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루 종일 내린 비에 제습기와 에어컨을 번갈아 껐다 켰다. 그야말로 홀로 입사 일주년을 기념하기에 딱인 날씨다. 어쩌다 보니 오늘에 와 있다. 아빠는 내 팔의 문신을 볼 때마다 평생 취직 못 할 거라고 소리쳤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번 시월로 벌써 입사 일주년이 되었다..
모기 물린 자국은 희미해져 가고 산책 후엔 옷깃에 나뭇잎이 달리는 계절이다. 어느새 매미들이 입을 다물었다. 뒷산을 타고 노는 새들 중 몇몇은 먼 나라로 떠날 채비를 할 것이다. 트렌치코트 입기엔 낮이 더워 일주일은 더 기다려야 하는 이때, 니트 조끼를 입기로 한다. 뒤죽박죽 날씨에 걸맞은 현명한 선택이리라. 그렇게 흰색 반팔 티셔츠 위에 남색 조끼를 걸치고 집 밖을 나설 때는 당당했으나 한낮의 햇빛에 등허리가 금세 축축해졌다. 가고 싶었던 서점에 업무 상 방문하게 된 덕분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영업하지 않는 날을 대관한 터라 일반 손님도 없었다. 넓고 깨끗하고 조용한 서점 안에서 영원히 헤매고 싶었다. 참지 못하고 책을 사고 말았다. 갖고 싶은 책을 만나면 브레이크를 밟기 힘들다. 읽지 않은 책..
밤 아홉 시 즈음 깨닫는다. 출출하다는 것을, 그리고 뭔갈 먹기엔 늦은 시간이라는 것도. 해가 진 뒤에 간절해지는 음식은 대부분 기름지고 달고 짠 것들이다. 먹고 나면 금세 더부룩해진다. 자연스럽게 냉장고에 맥주가 남아있던가 기억을 더듬어보게 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그만 두자. 여기서 굴복한다면 정해진 미래는 하나뿐이다. 기름진 음식을 먹고 맥주로 식도와 위를 식힌 뒤 빵빵해진 배를 눕혀 힘들게 잠들었다가 피곤이 배가 된 채 아침에 깨어나는 것, 그리고 어젯밤을 후회하는 것. 미래를 엿본 현명한 자는 요거트 하나, 이것만으로 굶주린 충동을 얼마든지 굴복시킬 수 있다. 확고했던 다짐은 밥풀로 붙여둔 메모지처럼 시간이 지나자 힘없이 나풀거려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요거트를 위장으로 한 숟갈씩 내려보냈더니 ..
쫓기듯 이사한 집엔 빛이 들지 않았다. 창문은 눈보다 높게 달려 있었다. 종종 그 앞으로 지나다니는 주인집 아줌마의 쓰레빠가 보였다. 무릎은 커녕 종아리도 간신히 보이는 좁은 창문이었다. 가끔 고양이들이 창틀에 올라가 어딘가를 골똘히 보았다. 창문이 너무 높게 달린 탓에 거길 뛰어 오르고 뛰어 내릴 때 주변의 많은 것을 넘어트렸다. 비 오는 날엔 젖은 먼지가 튀고 밤엔 벌레가 들어오는 골치 아픈 창문이었다. 그래도 그 비좁은 구멍으로 들어올 강도는 없을 것 같았다. 동네는 산비탈에 있었다. 집을 나오면 무조건 가파른 내리막이나 오르막을 걸어야 했다. 조금만 걸어도 허벅지가 아프고 숨이 찼다. 도로엔 사람을 위한 여백이 없었다. 마을버스 백미러가 귓가를 스쳐도 앞만 보고 걸었다. 마을버스, 택배 트럭, 택..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고 해서 미술대학에 갈 필요는 없다. 미술대학을 졸업해놓고 미술학원에서 배운 대로 그리는 나를 보니 알겠다. 학원에서 배운 입시 미술 기본기는 대학에서 배운 수많은 이론보다 깊은 곳에 들러붙은 뒤 흡연자 폐 속의 타르처럼 떨어지질 않는다. 어젯밤 간만에 파레트를 꺼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입시 미술학원에 등록하며 샀던 이 낡은 수채 파레트는 그때의 붓 세트와 함께 아직까지도 종종 책상 위에 오른다. 며칠 전 본 오리를 그리고 싶었다. 맑은 날 오리가 노니는 물가는 반짝이고 시원했다. 당시의 사진을 참고해 스케치를 하고 수채 물감을 풀어 색을 칠했다. 한참 그려놓고 보니 알겠다. 이건 머리가 아닌 손의 기억으로 그린 그림이다. 수고를 덜고 그려 발전이 없는 그림. 길가에 세워놓은 트..
커튼을 걷고 오늘의 하늘을 처음 본 순간 생각했다. 이런 날 바깥에 안 나가는 사람은 바보라고. 서둘러 아침 식사를 하고 간단히 씻은 뒤 집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집집마다 묵은 이불을 꺼내 빨고 바깥에 말리도록 마을방송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하늘이었다. 햇살 아래를 걸으면 따스하고 그늘 속을 걸으면 상쾌한 지금은 26°C. 주민 센터 앞 습도계는 34%를 알린다. 일 년 중 가장 완벽한 순간의 정확한 온도와 습도의 수치를 알아낸 것이 못내 뿌듯하다. 갓 만든 유리처럼 투명한 하늘 아래에서라면 어디든 걸어서 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한동안 무섭게 내린 비에도 숲은 선퇴*를 구석구석에 남겨놓았다. 나뭇잎 사이를 헤치고 햇살이 드디어 말간 땅에 닿는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앓고 난 뒤 오랜만에 ..
실내에서 볼일 보는 것을 수치스러워 하는 개들 중 하나가 우리 집에 산다. 이 개는 자신이 집안일을 돕기는 커녕 배설물 처리까지 요구하기가 염치 없는 일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는 집 안에서 절대 볼일을 보지 않는다. 대신 드넓은 하늘 아래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배변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덕분에 우리가 함께 살게 된 이래로 하루 세 번의 산책은 눈과 비도 막지 못하는 중대한 일과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산책이라는 게 보호자 입장에선 썩 재미가 없다. 매일 같은 코스의 산책이 즐거운 건 개 뿐이다. 함께 걸을 때의 리듬은 불연속적이고 예상하기 어려운 전개를 보인다. 개가 몇 걸음 걷다 말고 자꾸만 멈춰서서 코를 킁킁거리기 때문이다. 어찌나 신중해보이는지 이제 그만 가던 길 가자고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