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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긴개 (81)
성북동 글방 희영수
바로 재벌집 며느리로 시집갈 기회를 잃었다는 뜻이다. 이 문신만 아니었다면 삼성, 현대, 엘지 어디든 시집가서 평생 놀고먹고 살았을 텐데, 얼마나 아쉬운지 모른다. 심지어 우주비행사도 문신을 새길 수 있지만, 재벌집 며느리가 될 순 없는 법이다. 몸에 그림을 박아 넣은 이후 이따금 내 마음을 쓰리게 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또 하나는 바로 일본 대중 온천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한국의 문신인들이 방문했기에 일본 온천의 프런트마다 ‘문신 입장 금지’라고 한국어로 써 붙여 두었을까. 비록 평생 한국에서 살며 자발적으로 목욕탕에 간 적이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지만, 먼 나라 이웃나라 일본의 온천에 마음대로 갈 수 없다는 것은 역시 매일 내 마음을 꼬집곤 한다. 마지막 하나는 평생..
고양이도 간암에 걸린다. 동물의료센터 수의사의 소견에 따르면 우리 집 첫째 호두의 간에서 발견된 이 종괴는 악성일 가능성이 높다. 외부기관에 정밀검사를 맡기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항암 치료의 가능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오늘 오전 또다시 의료센터에 다녀왔다. 이미 며칠 전 이곳에서 이박 삼일 간 입원을 했던 호두는 센터에 들어서자마자 버둥거렸다. 호두는 무엇으로 병원에 왔다는 것을 감지할까. 강아지가 겁에 질려 짖는 소리, 예민해진 고양이가 사납게 우는 소리, 소독약과 낯선 동물들의 냄새, 치료실의 강한 불빛, 보호자들의 걱정 가득한 말소리. 그 무엇도 반가운 자극은 아니리라. 도망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호두는 품 속으로 조용히 머리를 파고들었다. 나는 그저 머리를 몇 번 쓰다듬으며 이름을 불러줄 ..
친구가 키우던 개의 죽음을 말할 때마다 내가 눈물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이야기는 여러 번 중단되곤 했다. 동물병원에서 장례식을 치러준 뒤 유골을 어느 나무 아래에 묻었다는 것까진 잘 들었지만 그 이상은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히 슬프다는 이야기로 끝났겠지. 하지만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아침에 일어났을 때 타다닥 다가오는 발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배변 봉투와 리드줄은 여전히 현관에 걸려있는데 함께 밖에 나갈 개가 없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가족을 잃은 친구의 기분이 어떠했는지 가능한 성심성의껏 귀담아 들어야 마땅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러고 싶지 않기도 했고. 남의 개가 죽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반려동물이 없는 사람이라면 남의 일로 생각하기 때..
이틀 전 생일이었다. 그러니까 어린이날 전날인 5월 4일 말이다. 어렸을 땐 어린이날과 생일 선물을 쿨하게 퉁쳐서 하나로 주는 부모님 덕분에 생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생은 생일과 어린이날 받는 선물이 다른데, 나는 왜 하나로 끝인가. 그러나 어차피 부모님께 선물을 받아도 썩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게다가 선물을 보고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간 도리어 생일날 혼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엔 생일 선물의 개수나 여부에 연연하지 않으려 애쓰게 되었다. 차라리 받지 않는 것이 혼나기 싫어 억지로 기뻐하는 표정을 짓는 것보다 마음이 편하다. 우리 가족은 상대방 마음에 드는 선물을 고르는 것도, 선물을 받고 감사를 표하는 것도 서툴렀다. 엄마와 아빠 역시 선물을 받으면 여기저기 싸구려를 받..
애인과 헤어질 것 같던 순간도 지금처럼 불안하지는 않았다. 울분이 폐를 쥐어짜던 순간에도 한숨 정도는 시원하게 내쉴 수 있었다. 또 어떤 비극은 비웃음만으로도 물리칠 수 있었다. 허나 지금은 다르다. 입꼬리 양쪽에 무거운 추가 꿰인 듯 도무지 웃을 수 없다. 어깨 근육을 수축시킨 긴장이 가시질 않는다. 참다못해 터져 나오는 숨마저 스타카토로 조금씩 끊어 쉬었다. 삶의 ⅓ 분량이 통째로 삭제될 위기 속에서 나는 의자 위에 웅크리고 앉아 머리통을 양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칠 뿐이었다. 현대인의 자산 범위는 90년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게 큰 폭으로 확장되었다. 개인용 컴퓨터와 휴대전화의 보급으로 자신의 신체와 재화 같은 물질적 자산뿐만 아니라 온라인상의 기록과 같은 손에 잡히지 않는 무형적 데이터까지도 개..
인공 생태계는 묘한 쾌감을 준다. 몇 년 전 물고기 키우기, 일명 ‘물생활’에 빠져든 적이 있다. 물생활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일명 ‘니모’로 널리 알려진 흰동가리 같은 바닷물고기와 산호 등을 키우는 해수파가 있고, 구피 같은 민물고기와 수초 등을 키우는 담수파가 있다. 둘은 어항 세팅과 장비, 투입되는 생물, 관리법 등이 그 물맛만큼이나 상이하다. 보통 초보들은 담수, 자신만만한 사람들은 해수에 도전하는데, 입문 코스라는 이미지가 있어도 담수항을 만만하게 봐선 안된다.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는 수초항도 마찬가지. 어항 속 인공 생태계를 만들고 싶다면 우선 어항에 흙을 깔고 물이 ‘잡힐’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는 장비와 약품 등을 사용하여 수돗물이 물고기가 살 수 있는 성질을 갖추도록 만든다는 ..
이소연 박사님은 대한민국 최초 우주인입니다. 우주 비행 15주년을 기념하며 우주인에 선발되고 우주를 날고, 지구로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들을 허심탄회하게 모아 『우주에서 기다릴게』를 출간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말로 전하는 우주 이야기를 들어볼 기회는 정말 흔하지 않지요. 4월 22일 토요일 저녁, 우주인 이소연 박사님을 만났습니다. 책 내용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실제로 만나뵌 이소연 박사님은 사방으로 유머를 분출하는 분이었습니다. 강연이 이어질수록 청중들은 푹 빠져들어 쿡쿡 웃기 시작했습니다. 웃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여유로운 태도와 솔직한 말솜씨가 탈지구급이었습니다. 강연에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요란한 표현처럼 느껴지겠지만 정말 그랬습니다. 훈련 몇 시간 만에 몸무게 5킬로그램이 빠..
우리의 머리 위를 덮은 저 검은 하늘은 인류가 문자를 발명하기 전, 공룡의 멸종 전, 지구에 물이 생겨나기 전, 태양이 붉게 타오르기 전부터 그곳에 있었다. 저 암흑의 가장자리는 무한으로 펼쳐져 있다. 그 끝을 가늠하기 위해 아늑한 종이 위에서 10개의 아라비아 숫자를 이리저리 굴려보겠지만 절대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우주는 그 자체로 영원한 시간이자 인류가 만든 모든 신의 공통분모이다. 지구 한 톨에도 무한의 가능성이 담겨 있을진대 옛사람들이 감히 지구 밖을 상상하는 것은 그야말로 신의 권능을 넘보는 엄청난 일이었으리라. 1977년 지구를 떠난 인류의 전령들은 삼십여 년이 지나서야 겨우 태양풍의 영향이 미치는 경계를 벗어났다. 돌아올 계획 없이 떠났던 보이저 1호와 2호는 이제 인류보다 외계생명체와 더..
이제 이 글에도 커다란 제목을 붙여볼까 한다. 짧은 분량의 에세이 쓰기를 시작한 21년 10월부터 지금까지의 나는 이를테면 운전 연수생에 지나지 않았다. 어디로 달릴 것인지 고민하는 것은 미래에 맡겨두고, 우선 페달이 어디에 있는지 백미러는 어떻게 봐야 하는지부터 천천히 감을 익혔다. 일 년 반 동안 일주일 한 편 쓰기를 수행했다. 그 덕에 이제 기계적으로 모니터 앞에 앉아 글자 수를 늘려가는 것은 익숙해졌다. 주어진 주제가 만만하든 만만찮든 개의치 않고(않은 척하고) 한 편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가까운 시일에 만들어진 기억 중 주제에 마침맞은 것이 있다면 신이 나서 빠르게 첫 문단을 채워간다. 반대로 한동안 머릿속에 드나든 적 없던 종류의 주제가 주어질 때는 두 번째 문단을 쓰는 와중에도 도..
지금을 미루고 있다. 지금은 단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준비하는 기간일 뿐이라고 되뇐다. 정확히 뭘 준비한다는 건지는 몰라도, 네 머릿속에 있는 그 대단한 미래를 위해 지금은 참아 견뎌내야 해. 하기 싫은 일을 처리하고 소중한 하루하루를 월급으로 교환해야지. 집세 내고 장보고 적금 넣고 공과금 내고 커피 마시고 나면 얼마 남지도 않는 돈이지만 다들 그렇게 살잖아. 징징댈 일이 아니야. 이렇게 말하고 나니 이제 정말 어른이 다 되었다는 걸 느낀다. 어른의 고민을 짊어졌구나. 얼레벌레 살아도 스스로를 책임지고 있다. 닥친 일에서 도망치기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어. 멋져. 대단해. 동시에 분하기도 하다. 결국 이런 어른이 되었네. 세상의 재미있는 일은 다 벌일 것처럼 으스댔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