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키우던 개의 죽음을 말할 때마다 내가 눈물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이야기는 여러 번 중단되곤 했다. 동물병원에서 장례식을 치러준 뒤 유골을 어느 나무 아래에 묻었다는 것까진 잘 들었지만 그 이상은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히 슬프다는 이야기로 끝났겠지. 하지만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아침에 일어났을 때 타다닥 다가오는 발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배변 봉투와 리드줄은 여전히 현관에 걸려있는데 함께 밖에 나갈 개가 없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가족을 잃은 친구의 기분이 어떠했는지 가능한 성심성의껏 귀담아 들어야 마땅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러고 싶지 않기도 했고. 남의 개가 죽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반려동물이 없는 사람이라면 남의 일로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반려동물이 있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겪게 될 일이기에 미리 상상하기가 두려워서 일지도 모른다. 우리 집 네발짐승 삼 남매의 이름은 호두, 째즈, 란마. 첫째인 호두는 하얗고 긴 털을 가진 고양이이다. 셋 중 유일한 가정집 출신으로 2011년 생후 6개월부터 나의 가족이 되었다. 둘째 째즈는 갈색과 검은색 무늬를 머리와 등허리에 가진 흰색 고양이. 보호소 출신으로 2016년 생후 3개월 즈음 호두의 동생이 되었다. 역시 보호소 장기 멤버였던 갈색 푸들 란마는 연령 미상의 상태로 2017년에 우리 집 막내가 되었다. 사람들이 종종 묻던 말에 미리 답하자면, 의외로 강아지와 고양이는 한 지붕 아래 잘 지낸다. 서로 가까이에서 잠들기도 하고, 강아지가 산책길에 묻혀 온 냄새를 고양이들이 킁킁 맡기도 한다. 간식을 꺼내면 셋이 나란히 앉아 자신의 순서를 기다린다. 이 모든 것이 별 문제없었다. 2023년이 되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2023년이라 함은 호두가 12살, 째즈가 7살, 란마가 6+a살에 다다랐다는 말이 된다. 고양이 평균 수명이 13년에서 20년 사이라는 위키백과의 기록에 따르면 호두가 노년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호두는 여전히 아기 때와 똑같이 귀엽다. 밥도 잘 씹어먹고 부르면 곧잘 달려온다. 양양양 말도 많고 높은 창가에도 올라간다. 다만 원래도 마른 편이었던 호두가 최근 들어 등뼈가 만져질 정도로 살이 빠졌다. 나이 든 고양이에게 흔하다는 갑상선 기능 항진증 때문인가 싶어 검색해 보았지만 살 빠짐 말고 다른 증상은 일치하지 않는다. 일단 병원에 가봐야겠지. 질환의 증거를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병 때문이라면 치료 등의 방법을 찾을 수나 있다. 정말 겁이 나는 상황은 노화로 인해 신체 여러 기관의 기능이 약해진 탓이라는 진단을 받는 쪽이다. 그거라면 의사 선생님도 별다른 방법이 없다. 닥쳐올 날을 마음속에 품고 함께하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밖에는. 호두가 어렸을 땐 나도 어렸다. 이미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은 후였지만 세상에 대해 아는 거라곤 새끼 고양이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수도세나 도시가스비는 뭔지, 쓰레기를 집 앞에 이른 시간에 내놓으면 물게 되는 벌금은 또 뭔지, 혼자서 집으로 들고 올 수 있는 쌀의 무게는 어느 정도인지 도대체 알 수 없었다. 호두를 데리고 오기 전에는 열 살 먹은 나의 첫 강아지 마루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마루는 짖는 법 없는 조용하고 까칠한 개였다. 둘만으로는 외로웠다. 집이 시끌벅적했으면 싶었다. 친구가 권해서 덜컥 호두를 입양한 데는 그런 마음이 동해서였을 것이다. 하얗고 부드럽고 작았던 호두는 으레 생각하는 도도한 고양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항상 나와 가까이 붙어있으려 하고 이름을 부르면 양양 울며 달려왔다. 만족할 때까지 머리를 쓰다듬도록 요구했다. 마루와는 다르게 지나간 자리에 온통 흰 털을 날렸다. 내버려 두면 산신령처럼 털이 멋있게 자랐지만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호두가 커갈수록 마루는 움직임이 줄어들고 잠을 자는 시간이 늘어났다. 열다섯 살 되던 해에 마루는 죽었다. 곁을 지켜주지도 못했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을까. 나는 제대로 슬퍼할 줄도 몰랐다. 다시 호두와 단둘이 남았다. 호두는 내가 어른이 되는 동안 상냥하게 기다려주었다. 화장실 밖에 응가를 하는 습관이 있었지만 그것 말고는 훌륭했다. 간식을 손에 들고 있을 때가 아니라면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어설픈 수준으로 미용을 해놓아도, 심지어 가위질을 하다가 상처를 내도 곧바로 나를 용서했다. 목욕을 당할 때에도 서글프게 울어댈 뿐 내게 분풀이를 하지는 않았다. 대체로 관대하고 애교가 많았다. 항상 과분한 고양이라고 생각했다. 대책 없이 데려온 주제에 너무나 멋진 고양이를 얻었다. 손님들은 누구나 호두를 좋아했다. 호두도 손님들을 몹시 반겼다. 딱 한 사람, 갑자기 목덜미를 잡아 들어 올리자 놀란 호두가 세게 깨물었던 적이 있을 뿐. 그런 호두도 나이가 든다. 믿기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품 속에 파고들며 함께 살아가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조금씩 가벼워지다가 어느 날은 사라져 버린다. 그날이 머지않았다. 이런 생각은 지금껏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미리 슬퍼할 필요 없어. 후회하지 않으려면 있을 때 잘하면 돼. 그러나 나는 벌써 후회한다. 미래의 일은 이미 알고 있다. 소중하고 작은 호두가 불사의 몸이 아니라는 사실도. 또 걱정되는 것은 보호소 출신 셋째 란마. 데려올 적의 나이가 다섯 살에서 여덟 살 사이의 미상이었기에 지금이 중년기인지 노년기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당시 의사 선생님은 여덟 살은 되어 보인다고 했다. 그럼 육 년을 같이 지낸 지금 란마가 열네 살이라는 말인가. 란마는 여전히 빠르게 달리고 밥도 잘 먹고 시끄럽게 잘도 짖는다. 도대체 란마는 몇 살일까. 식구들의 평균 수명이 짧으니 일 년 일 년이 시한부 선고처럼 느껴진다. 그 사이 나도 조금 늙었다. 때때로 나는 세 식구가 전부 죽고 나면 오래도록 여행을 다녀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네발짐승이 아무도 없다면, 하루에 두 번 산책을 하고 매일 화장실을 청소해 주길 기다리는 식구가 없다면 나도 더 이상 집에 돌아갈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어디든 가서 어떻게든 살아버려도 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