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단편소설] 선우야 결혼 축하해_ 긴개 231023 본문

2021-2023 긴개

[단편소설] 선우야 결혼 축하해_ 긴개 231023

긴개 2023. 10. 23. 23:37





방미선은 포장 이사를 부를 걸 하고 벌써 수십 번째 후회했다. 이삿짐을 일일이 싸는 것도 징그럽게 힘들었지만, 지저분한 집을 직접 청소하고 다시 그 꾸러미들을 푸는 것 역시 끝이 없을 것처럼 힘들었다. 새 집은 이전보다 월세가 훨씬 저렴하지만 그 대신 몹시 낡았다. 미선이 어릴 때나 유행했던 알루미늄 창틀을 용케도 지금까지 달고 있다. 게다가 문은 또 어찌나 많은지, 이곳저곳 열 때마다 새끼 고라니처럼 끼익 끼익 비명을 질러댔다. 돈만 아쉽지 않았어도 이렇게 다 쓰러져가는 주택으로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사 온 첫날 밤, 미선은 안방 구석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새로 바른 벽지 아래로 직사각형 모양으로 움푹 파인 자국이 있었다. 허리를 수그리면 그 직사각형 안으로 몸이 통과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예전엔 그것이 문이었으리라. 옛날 집에는 으레 부엌에서 안방으로 음식을 보내는 쪽문이 있다고 들은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쪽은 부엌이 아닌데. 아마 공사를 하며 용도를 바꾼 모양이지. 미선은 금세 문의 존재를 잊었다. 이미 세상은 막힌 쪽문 따위보다 거슬리는 일 투성이었으니까.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쪽문은 다시금 방미선의 관심을 끌었다. 미선이 유독 외로웠던 어느 날이었다. 그는 외롭다 못해 화가 났다. 예전엔 자신도 이렇게 혼자가 아니었다. 대학교 1학년 때에는 다른 과와 함께 한 단체 미팅에 끼어 모두를 즐겁게 하는 농담을 몇 번 하기도 했다. 덕분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져 그 날 여러 커플이 탄생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대학생 시절을 떠올리다 보면 결국 노선우와의 일들마저 생각해 버린다. 그것이 미선의 가슴을 속에서 꽉 비틀고 쥐어짜며 숨을 못 쉬게 만들었다. 애들은 남자 밝히던 그 년 말만 듣고 내 말은 들어줄 생각도 하지 않았지. 그렇게 편협하고 멍청한 애들이랑은 나도 친하게 지내기 싫어. 그런 애들이랑 친하면 나도 멍청해 보일 수 있으니까. 손해 볼 뻔한 거지. 그러나 미선의 핸드폰은 몇 주 째 광고전화만 받고 있었고, 그날은 그런 전화마저 일절 오지 않았다. 미선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사실을 깊숙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목구멍 아래가 쓰라렸다. 그때였다.

집 어딘가에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두 명이 아닌 여러 사람의 것이었다. 미선은 더듬더듬 집을 돌아다니며 소리의 근원을 찾다가 벽지 아래 감춰져 있던 쪽문 앞에 멈춰 섰다. 작은 문 안쪽에서 따뜻한 소리가 작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차갑게 남을 비웃고 괴롭히는 웃음이 아니었다. 그저 서로가 좋고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워서 터져 나오는 듯한 밝은 소리였다. 미선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기요, 거기 누구세요?”

그 순간 웃음소리는 뚝 끊어졌다. 숲에 사는 작은 곤충과 동물들이 커다란 인간의 등장에 놀라 숨을 멈추고 즐거이 내던 울음마저 다급히 삼키는 것처럼, 밝고 따뜻한 웃음소리는 급사해 버렸다. 놀란 미선은 뻗으려던 손을 황급히 등 뒤로 숨겼다. 아쉽고 붙잡고 싶었다. 잘못 들은 건지 궁금했다. 그러나, 이미 세상은 막힌 쪽문 너머의 웃음소리 따위보다 거슬리는 일 투성이었으므로 밤이 깊자 미선은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미선은 일어나자마자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챙이 긴 캡을 깊게 눌러쓰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을 만한 무채색의 상의를 골랐다. 바지 역시 무늬 없는 검은색이었다. 손가방 하나 없이 미선이 향한 곳은 유명한 호텔이었다. 으리으리한 로비에는 우아한 카페가 있었으며, 2층에는 500명이 족히 식사를 할 거대한 웨딩홀이 있었다. 오늘 여기에서 노선우의 결혼식이 열린다. 초대받은 하객들은 모처럼 방문한 고급 호텔에 최대한 오래 머무르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로비의 카페가 최적의 장소이리라. 이 카페 구석에 앉아있다 보면 선우에 대해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건질지도 모른다.

같은 과 동기인 선우와는 1학년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만나 친구가 되었다. 여중여고를 졸업한 선우는 조금 따분하고 답답한 데가 있었지만 미선을 만나 유머 감각도 늘고 점차 활달해졌다. 그러더니 점차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아지더니 어느새 모든 학과 활동의 중심이 되어있었다. 미선은 조금 당황했다. 자신 덕분에 선우가 이런 관심을 받게 되었는데 어째서 그 공을 널리 알리지 않는지 묻고 싶었다. 뭐 원래 부족한 애였으니까. 미선은 나름대로 선우를 이해하려 애썼다. 선우를 이끌어주는 것이 여전히 자신의 몫이라고도 생각했다. 문제는 결국 남자 때문에 일어났다.

어느 순간부터 선우는 같은 과 남자들 뿐만 아니라 다른 과 남자들로부터도 관심을 받고 있었다. 미선의 눈에는 그게 좀 과했다. 선머슴 같은 멀대 여자애를 왜들 그리 좋아하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선우가 조금씩 우쭐대는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미선이 과 남자 중 유일하게 괜찮다고 생각했던 정현이 선우 옆에 바짝 앉아 술을 따르던 날, 미선은 술집 뒤로 선우를 불러내 진심을 담아 충고했다.

“남자들한테 그렇게 함부로 웃어 주지 마. 요즘 과 애들이 너 걱정하더라고. 좀 싸 보인다고 하던걸”

선우는 그런 게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자리가 파하고 굳은 얼굴의 선우가 돌아간 다음엔 정현을 다시 불러냈다. 선우가 기다린다는 말을 덧붙여서. 정현은 술집에 홀로 앉은 미선을 보고 입꼬리를 내렸다. 그러나 같은 과 동기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일단 미선 옆에 앉았다. 미선은 슬며시 정현 가까이 의자를 당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다. 선우가 요즘 다른 과 남자애들이 손짓만 해도 자지러지게 웃으며 배꼽을 잡는다는 둥, 저러다 뭔 일 날 것 같아 친구로서 걱정이 크다는 둥, 오늘만 해도 정현과 살갑게 이야기하다가 곧바로 다른 남자의 연락을 받고 집에 가버렸다는 둥 떠드는 동안 정현의 표정은 점점 부서질 것처럼 메마르게 굳어갔다. 아랑곳하지 않고 주절대던 미선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정현은 사라졌다. 정현 앞에 놓인 술잔은 직원이 처음에 따라 준 양 그대로였다.

이후 학교에서는 한바탕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정현과 선우가 밤 사이 만나 자초지종을 나누고 이 모든 이야기가 과 아이들 사이에 흘러간 후 미선은 고립되었다. 사람들은 마치 이런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모두 미선의 진실은 가볍게 묵살하고 선우의 일방적인 주장만 선별해 받아들였다. 미선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으나 그 여우 같은 선우를 이길 방법은 없었다. 결국 친구를 돕고 걱정하던 자신만 외톨이가 되어 남은 학기를 쓸쓸히 보냈다. 가능한 모든 교양 수업은 사이버 강의로 대체하고,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전공 수업은 교수님보다 살짝 늦게 강의실에 들어가고 교수님보다 조금 일찍 강의실을 나오는 방법으로 견뎌냈다. 그렇게 미선의 학교 생활을 악몽으로 만든 선우가 결혼을 한다. 그것도 그 안목 없는 남자 정현과 말이다. 미선은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노선우의 실체를 까발리고 세상이 미선을 다시 있는 그대로 봐주었으면 했다. 그래서 이렇게 피곤을 무릅쓰고 나와 카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이다.

예상대로 선우의 지인과 친척들이 카페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자연스럽게 선우와 정현, 그리고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들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미선이 기대하고 바라던 끔찍한 비화는 없었다. 그저 ‘착하고 인기 많은 두 사람’ 같은 뻔한 소리뿐이었다. 참다못한 미선은 다들 위선자들 뿐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귓동냥으로 건질 것이 없어지자 결혼식장 안으로 들어가려던 미선은 고급 호텔의 직원들에게 가로막혔다. 그는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단 말만 듣고 결국 빈 속에 커피만 들이켠 채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동안 골머리를 앓던 미선은 어느 날 저녁 대학생들이 자주 사용하는 커뮤니티 앱을 켰다. 그리고 익명게시판에 선우의 실체를 알릴 글을 써 내려갔다.

[  제목: 학교 다닐 때부터 남자 밝히는 걸로 유명했던 ㄴㅅㅇ, 결혼한 남자가 불쌍
  내용: 우리 과 ㄴㅅㅇ 이번에 ㅅㄹ호텔에서 결혼했는데 분위기 박살이었음 ㄹㅇ…. 로비 카페에서부터 남자 걱정하는 소리 웅성웅성 들려서 거기 일하는 직원들도 다 들었을 듯ㅎㅋ;,, ㄴㅅㅇ 학교 다닐 때 남자가 관심주면 좋아 죽는 걸로 개유명했는데 그거 잘 모르던 애 하나 낚아서 걍 결혼한 거.. 여자 보는 눈이 그렇게 없는 거 지 잘못 맞긴 한데, 앞날이 좀 안타깝긴 해. 안 그럼??  에휴 걔네 부모님은 이 사실 다 알고 결혼하셨나. 본모습 알고 나면 절대 못 하게 말리셨을텐데 부모님 마음 찢어질 듯 ㅠㅜ..  ]

방미선이 쓴 글은 곧 높은 조회수를 올리더니 여기저기 퍼 날라지기 시작했다. 댓글은 적었지만 이만한 관심을 받았으면 되었다. 남 눈에 피눈물 나게 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옛 어른들 말이 틀린 게 하나 없다. 어릴 때의 행실이 이렇게 지금의 발목을 잡을 줄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개운해진 마음으로 샤워를 했다. 다음날 아침엔 콧노래도 불렀다. 밥알 하나하나가 맛있고 소화도 잘 되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글을 여러 번 확인했다. 그러다 문득 선우가 이 사실을 알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소셜 미디어 앱에 거짓으로 신상을 등록한 계정으로 로그인한 뒤 선우의 계정을 눌러보았다. 몇 시간 전에 올라온 선우의 새 게시물을 보는 순간 미선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거기에는 자신의 글을 캡처한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  삼일 안에 이 글 작성자가 사과하지 않으면 곧바로 명예훼손으로 고소장 접수하겠습니다. 이미 고소장 작성은 완료한 상태이며 제출만 하면 제 손을 떠나 합의고 뭐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황당한 일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변호사 아주버님 귀찮게 해 드려 정말 죄송했지만 오히려 저보다 더 열내며 가만두지 않겠다고 고소를 도와주고 계세요. 아주버님은 바로 소장 제출하자고 하셨지만 저도 짐작 가는 곳이 있어 우선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그분이 본인 삶에 집중하고 더 볼 일 없이 각자의 길에서 행복하길 바랍니다. 이것이 헛된 기대가 아니길 빌며,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

방미선은 글을 읽는 내내 참고 있던 숨을 가까스로 토해냈다. 숨을 내쉬어도 가슴속은 유독한 기체로 가득 찬 것처럼 답답했다. 게시물에 태그 된 계정을 누르니 정장에 대형 로펌 소속의 명찰을 달고 있는 남자의 프로필이 나왔다. 커다란 빌딩 앞에서 커피를 들고 웃는 그의 얼굴에서 정현을 닮은 입매가 보였다. 선우와 정현의 결혼식에 참석해 노래를 부르는 동영상도 최근에 올라와있다. 훤칠하고 믿음직한 인상이다. 그러니까 이 남자와 선우가 미선의 모가지를 콱 잡은 셈이다. 아니, 정현도 한 패일테니 셋이 미선 하나를 괴롭히려 또 손을 잡은 것이다. 도대체가 사람들은 얼마나 잔인하고 배타적인가. 그러나 이대로 모른 척했다간 저 셋 앞에 전부 무릎을 꿇어야 할 판이다. 노선우는 그렇다 치고, 정현 앞에서까지 굴욕적으로 사과하는 수모를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자기가 글을 안 썼다고 하기엔 대형 로펌의 변호사가 금방 거짓을 밝혀낼 것 같았고, 맞대응하려 변호사를 선임할 돈은 구할 방법이 없었다. 곤란에 처한다 싶으면 냉큼 남의 뒤에 숨어 이득을 보는 선우에게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과할 생각을 하니 죽을 맛이었다. 손가락을 한참 깨물며 얼굴을 찌푸리던 미선의 등 뒤에서 또다시 낯선 소리가 들렸다. 행복에 겨워 밝게 웃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그 쪽문이다. 미선이 슬금슬금 다가가 귀를 기울이자 그중 하나의 목소리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의 목소리이다.

미선은 벽지로 막힌 쪽문 앞에 쭈그려 앉아 그 소리를 들었다. 자신이 여럿에게 둘러싸여 즐겁게 웃고 있다. 생일 선물을 주고받은 것 같기도 하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걸 듣고 있자니 예전 단체 미팅 때 자신의 농담을 듣고 같이 있던 사람들이 와하하-하고 웃었던 때의 기분이 들었다. 저 안에서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걸까. 그는 손을 뻗어 벽지를 조금 뜯어보려다 문득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선우의 게시물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그 사이에 새로운 댓글이 많이 달려있었다.

‘이거 또 참아주지 마요 언니. 고소하면 그 사람 상습적이라 빼도 박도 못해요.’
‘걔 또 시작이네. 필요하면 우리가 증언도 해줄게.’
  → ‘아마 당한 사람 많아서 너도나도 가려고 할 듯.’
  –→ ‘나 이럴 줄 알고 예전에 모아놓은 자료도 많아.’
‘선우 도대체 몇 년째 미친년 한 명 때문에 고생하는 건지.. ㅠㅠ’
‘헐 걔 아직 살아있냐 ㄷㄷ  당연히 한참 전에 돌 맞아 죽은 줄’
‘근데 웃긴 거 뭔 줄 알아? 나 걔 선우 결혼식날 로비 카페에서 본 것 같아. 두리번두리번거리면서 왔길래 설마 초대받았나 했는데 입구컷 당해서 집에 감….’
→ ‘헐 소름 끼쳐’
–→ ‘염탐하려고 온 거???? 대박이다 진짜 걔 자기 인생 없을 무??’

모두가 돌팔매질을 하고 있다. 바로 미선에게. 여럿이 단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몰아세우며 괴롭힐 수 있을까. 아마 이것도 선우가 시킨 일일 것이다. 댓글을 달라고 시켰을 수도 있고, 미선에 대한 헛소문을 퍼트려 적개심을 갖도록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미선은 이제 참지 않기로 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손 놓고 있을 순 없다. 미선은 가짜 계정으로 선우에게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 글에 대해 사과하고 싶으니 00역 근처 카페로 나오라고.

미선은 카페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카페 옆 어두운 골목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카페로 들어서려는 선우를 소리쳐 불렀다. 흠칫 놀라던 선우는 이윽고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미선에게 다가왔다. 선우가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미선은 냅다 칼을 선우의 목에 꽂았다. 어설프게 손을 뻗느라 칼날에 자신도 조금 베였다. 하지만 더 이상 선우가 말을 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걸로 봐선 그걸로 충분했던 것 같았다. 미선은 다시금 참았던 숨을 시원하게 내뱉었고 선우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모를 피를 묻힌 채 집으로 달렸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미선은 쪽문으로 달려갔다. 쪽문 뒤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들고 있던 피 묻은 칼로 쪽문을 막고 있던 벽지를 죽죽 찢어냈다. 그리곤 오랫동안 닫혀 있어 뻑뻑해진 쪽문을 발로 여러 번 걷어찼다. 삐걱거리며 작은 문이 겨우 열리는 순간 미선은 피를 뒤집어쓴 얼굴과 맞닥뜨렸다. 문 너머엔 미선이 살고 있던 것과 같은 방이 있었다. 방 바닥에는 목에 피를 흘린 채 누워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의 옷이 어딘가 낯익었다. 그리고 쪽문 반대쪽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던 선우의 손에도 칼이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