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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1201 금 / 호두와 마루와 호두와 호두 / 긴개 본문
호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친구는 세담뿐이다. 새로 이사한 집에 세담이 놀러 와 호두는 어디 있냐 물었을 때 차마 숨길 수 없었다. 그 말을 하는 데 자꾸만 발음이 뭉개졌다. 내가 우는 것보다 빠르게 세담의 눈가가 벌게졌다. 그 뒤로도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몰랐고, 상대에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도 몰랐다. 사실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호두는 지금에서야 반려동물 이름으로서는 좀 흔한 축에 속하지만, 십삼 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호두는 호두라고밖에 부를 수 없었다. 당시 초등학생 때부터 키우고 있던 시츄 마루와 새로 데려온 어린 고양이를 잘 지내게 하려면 이름이라도 그렇게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스크림 이름에서 따온 마루와 호두, 호두와 마루. 늙은 개와 어린 고양이는 서로 있는 듯 없는 듯 무던히 지냈다. 마루는 시츄답게 차분하고 어른스러웠으며 호두는 어린 고양이라면 으레 그렇듯 까불고 구르며 집 안을 헤집어 놓았다. 갑작스레 가족을 해외로 전부 떠나보냈던 스무 살의 내게 둘은 유일한 가족이었다. 모두 떠나 조용해진 집에 소란과 온기를 가져다준, 밖으로 나돌던 나를 밤이면 집으로 돌아오게 한, 죽고 싶다가도 내일도 살아야 할 이유를 알려준 나의 개와 고양이.
아마 오래전 개를 키웠던 사람들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개 행복권 증진의 대표주자 강형욱 훈련사가 조금만 더 일찍 세상에 알려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혹은 그 개를 지금 다시 키운다면 어떨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 마루를 키울 때만 해도 개는 개였다. 물론 지금도 개는 개지만, 이제 개가 무엇을 원하고 느끼는지 고민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때는 그럴 필요를 몰랐다. 집집마다 종이 신문을 구독하느라 배변 패드가 아닌 신문지에다 볼일을 보게 하던 시절이었다. 산책은 내가 내킬 때만 나갔다. 병원도 거의 데려가지 않았다. 그래도 마루는 기꺼이 내가 냄새를 맡게 내버려 두고 콧등의 털을 바싹 깎도록 허락했다. 멍청한 주인과 관대한 개였다. 마루가 치매에 걸릴 때 즈음 강형욱 훈련사가 텔레비전에 등장했다. 내가 얼마나 무지하고 게을렀는지 깨닫고 괴로웠다. 마루의 마지막은 쓸쓸했다. 제대로 해준 게 하나도 없었다. 추모할 자격도 없다. 그러나 함부로 잊을 자격도 없다. 평생.
호두는 마루가 사라져 쓸쓸했을까. 관심을 독차지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대단한 고양이였다. 목욕을 시킬 때마저 화를 내지 않았다. 딱 한 번, 호두가 사람을 세게 문 적이 있었다. 집에 친구가 여럿 놀러 온 날이었다. 한 남자가 대뜸 호두의 목덜미를 잡아 들어 올렸다. 그 역시도 고양이를 두 마리나 키우고 있었다. 생전 당해본 적 없는 일에 호두가 발버둥 치며 도망갔다. 그러고는 내내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느닷없이 달려 나와 그 남자의 손을 콱 물었다.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고 모두가 웃었다. 호두는 내가 자신을 물에 적셔 박박 문지른 것보다 그 남자가 목덜미를 잡고 들어 올린 일에 더 화를 냈다. 내 의도와 그의 의도를 구분할 줄 알았다고, 혼자 그렇게 생각했다.
현관문을 열면 호두가 재빨리 뛰어나왔다. 어디든 호두가 있다면 그곳이 내 집이었다. 마루를 보낸 이후 어린 고양이 째즈를 데려 왔다. 째즈는 마루와도 다르고 같은 고양이인 호두와도 달랐다. 셋이 전부 다른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 참 좋았다. 점잖은 마루와 상냥한 호두와 야생의 째즈. 째즈는 내가 문을 어떻게 들락거리던 개의치 않았으나 호두만은 언제나 나를 반겼다. 충분히 쓰다듬을 때까지 주위를 맴돌았다. 의자에 앉으면 테이블 위로, 바닥에 앉으면 무릎 위로, 침대에 누우면 머리맡으로 자리를 잡았다. 호두는 내 주위를 도는 행성 같았다. 집에선 언제나 호두의 시선 아래에 있었다. 스무 살 이후로 호두와 함께 열 번의 이사를 다녔다. 작은 집에서 큰 집으로,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살림을 옮기며 텔레비전, 침대, 책상, 베개 등 모든 것을 쉽게 버리고 금세 잊었지만 호두는 어느 집에나 있었다. 호두가 내게 주는 것은 똥과 모래, 털, 사랑, 관심, 신뢰, 웃음, 말 그대로 호두의 모든 것.
어디로 튈지 가늠할 수 없는 째즈와 달리 호두는 얌전히 품에 안겨 동네 산책도 다녔다. 햇빛에 부신 눈을 가늘게 뜨고 낯선 냄새를 코 끝으로 찡긋 낚아챘다. 인적 드문 풀밭에 내려주면 천천히 한 발 한 발 내딛다가 마음에 드는 풀을 냅다 입에 넣었다. 혹시나 탈이 날까 놀라 풀에서 떨어트려 놓으면 아쉬운 듯 다른 풀로 몸을 돌렸다. 간암 치료 말기의 어느 날, 집 근처 풀밭에 산책을 나갔다가 불현듯 이 순간을 찍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햇빛 좋은 가을이었다. 아직 붙어 있는 나뭇잎들이 알록달록했고, 푸근한 듯 서늘했다. 호두가 경치 좋은 목에 앉아 눈을 슬몃 감았다.
며칠 뒤, 이사 전날밤이었다. 잠을 자는데 어깻죽지가 뜨끈하고 축축했다. 깨는 순간 눈물이 났다. 이제 하반신을 제어하기가 힘든가 봐. 오줌이 묻은 호두를 잘 닦아주고 베갯잇을 새로 갈았다. 매트리스를 꾹꾹 눌러 닦는 동안 가벼워진 호두가 축 늘어져 있었다. 이삿날 호두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안아주는 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책을 책장에 꽂다가 울고, 묵은 먼지를 닦다가 울었다. 우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호두가 새 집 거실에 가득 드는 햇볕을 즐길 수 있길 고대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다섯 달에 걸친 간암 치료가 이사와 함께 끝났다.
그 뒤로 한 달이 지났다. 호두의 투병은 끝났는데 나는 아직 아무것도 끝내질 못했다. 우리 사이엔 합의하지 못한 것뿐이다. 장례식을 하면 좋을지,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투병을 응원해 준 친구들에게 알릴 것인지, 알린다면 도대체 뭐라고 말할 것인지. 우선은 글을 쓰고 싶었다. 아직도 이게 뭔지 모르겠다. 그 이야기를 쓰면 뭔가 알게 될 것 같았지만 그렇지도 않다. 호두가 집에 없어서 어색하다.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게 어렵다면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힌트라도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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