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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2/07 (4)
성북동 글방 희영수
방학을 맞은 소윤이가 서울에 놀러 오겠다고 한다. 너 혼자? 너 혼자 고속버스 표를 예매하고 버스를 타서 서울에 와가지고 지하철로 갈아탈 수 있어? 소윤이는 코웃음을 친다. 이제 소윤이는 애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자식이 글쎄 18살이 된 것이다. 아니 너 엊그제만 해도 중학교 1학년이었잖아. 중1이 고2가 되기까지 억겁의 시간이 흘러야 했을 텐데, 그걸 겪어냈단 말이야? 덜컥 걱정이 된다. 청소년 소윤이가 살아낸 4년은 내가 살아낸 4년보다 몇 배는 촘촘하고 치열했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초당 24 프레임에 그쳤던 어느 날이 소윤이에게는 60 프레임 이상의 선명한 순간이었을지도, 그리고 그런 날들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서로가 동일한 시기를 살고도 다른 밀도의 경험을 ..
당시만 해도 전자제품을, 그것도 고가의 것을 사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용던*에 가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 얼굴도, 사는 곳도 모르는 사람에게 인터넷으로 비싼 물건을 주문한 뒤 그것이 멀쩡한 상태로 배송되길 기대하는 건 그야말로 어디 가서 사기당하기 딱 좋게 순진한 바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 상식적인 구매자라면 내 발로 찾아가서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에 들고 와야 했다. 적어도 우리 아빠 생각엔 그랬다. 아빠랑 단둘이 집 아닌 곳으로 간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런 일이 굉장히 드물었기 때문에 조수석에 탄 나는 어색해하면서도 조금 들떠 있었다. 우리는 용산전자상가에 노트북을 사러 가고 있었다. 아빠는 항상 동생에게는 최신 핸드폰을 사주고 나는 공짜폰을 쓰게 했다. 남자는 만년필..
직장 동료의 손과 발에 작은 물집들이 잡혔다. 증상을 검색해보니 한포진과 비슷하다. 통증이 심하지 않아 대상포진은 아닐 것이다. 한포진의 발병 원인은 확실하지 않다. 의사들도 다한증이나 스트레스, 유해물질 노출 등으로 이유를 짐작할 뿐이다. 몸의 표면에 나타난 이 투명한 물집들은 무슨 신호일까? 일을 잠시 쉬고 왕창 놀면 스트레스가 풀려 깨끗이 낫는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혹은 손에 물 묻히지 않게 해 줄 노예를 구하라는 계시 인지도 모른다. 몸속의 무언가가 정상적인 순환을 방해하여 피부에 경고를 남기고 있다. 애인은 한동안 요추 추간판 탈출증에 시달리며 부쩍 예민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까칠해지거나 표정이 매서워지지는 않는다. 그저 시름에 잠겨 청초하고 아름다운 웃음이 줄어들고 있다. 허리에서 느껴지는 ..
숨 막히게 괴로워 문득 인천공항에 간 적이 있다. 공항은 시간 때우기에 훌륭한 곳이다. 우선 구석구석 깨끗하고 쾌적하다. 인기 프랜차이즈 음식점들이 마구 모여있다. 많은 인파에 비해 소음은 견딜만한 수준이다. 어디에선가 시끄럽게 터져나온 소리들이 넓고 높은 공항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우우웅 줄어들어버린다. 피곤하면 어디든 털썩 앉아 쉴 수 있다. 화장실도 발길 닿는 곳마다 준비 완료. 쓰다보니 인천공항이기에 이런 장점을 꼽을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다. 이곳에서 사연 없는 눈빛은 없다. 급하게 출국장을 찾느라 허둥대면서도 들뜬 마음으로 발그레한 얼굴들이 우르르 사라지고 나면 잠든 아이를 업고 지쳐 말도 잊은 젊은 부부가 지나간다. 각양각색의 캐리어들이 요리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