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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2/05 (4)
성북동 글방 희영수
엄마가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달라고 했다. 사실은 그 말을 미처 꺼내기도 전에 나는 알았다. 부름의 의도에 따라 자신의 목소리 톤과 억양이 세분화되어 있다는 걸 엄마는 몰랐을 것이다.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자마자 그 음파가 뒤이어 주문하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나는 인형술사가 일으킨 목각인형처럼 벌떡 일어나 그대로 현관문으로 뛰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 잡힐 것이 뻔했으므로 한 번에 세네 칸씩 계단을 펄쩍펄쩍 뛰어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으로 빙글빙글 휘감긴 통로 위에서 엄마가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소리쳤다. 야 이 망할 년아 - - - - - 위 기억은 중학생 때의 것으로, 그때의 나는 어떻게든 남이 시키는 것을 하지 않으며 살고자 노력했다. 지금도 직장에 다니고는 있지만 고분고분시키는 대로 따르..
오월이 되기 전에 이사 온 이 작은 마을은 아주 높은 곳에 있다. 마을을 한 바퀴 휘- 돌아 산책 하다보면 저 아래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지붕들이 보인다. 아마 이전에 살던 해방촌보다 여기가 더 높을 것이다. 인구 수는 훨씬 적다. 그래서 훨씬 조용할 줄 알았는데 새소리가 아주 시끄럽다. 우리 집보다 높은 곳에 사는 것도 바로 이 새들이다. 마을버스 없이도 가파른 오르막길을 쉽게 올라와 통풍 잘 되는 나무 위에다 집을 지었다. 아랫동네 지붕들은 눈길만 돌려도 쉽게 구경할 수 있었는데, 이 작은 집은 뒷목을 뻐근해질 정도로 꺾어야 그 바닥만 겨우 올려다 볼 수 있다. 친환경적인 자재로 지어진 이 단독 주택은 형편에 따라 소박하게 지어졌는데, 그마저도 새끼가 크고 나면 텅 비어버린다. 한 때 눈도 못 뜨던 새..
이사 온 동네에서 가장 반가운 건 역시 아카시아 나무다. 출퇴근 할 때 마을버스를 타고 고작 두 정거장을 이동하는 대신, 산을 구불구불 가로지르는 하나의 길을 따라 약 25분 가량을 걸어다니기로 했는데 처음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때는 그들도 조용히 꽃송이를 다물고 있었을 때였다. 그러나 이사한지 일주일이 지나갈 무렵 도저히 코를 킁킁대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진하고 매혹적인 향기가 산 전체에 스며들었고 그제야 이 산 전체에 높이 10미터는 족히 넘을 아카시아 나무들이 서로 손에 손을 잡듯이 빼곡히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매년 피어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두 종의 꽃 중 하나가 이렇게 집 가까이 가득하다니 1.6배 오른 월세가 아깝지 않았다(다른 한 종은 수수꽃다리이다). 아카시..
내가 나에게 해주는 좋은 말들은 탁 트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서 외치는 소리처럼 잘 전해지지 않는다. 반대로 남이 내게 해주는 구린 말들은 아무리 먼 곳에서 소근거려도 고막에다 바로 때려박는 것처럼 생생히 들리는 데다가 온 몸에 붙은 고양이털처럼 쉽게 떨쳐내기가 힘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자랑스러워 하려다가도 오래전에 들었던 어떤 말 하나 때문에 입술만 달싹이다가 그치곤 했다. 그 말은 사실도 아니고 영양가도 없고 더럽게 재미도 없었지만 고등학교 졸업사진처럼 끈질기게 내 발목을 잡았다. 남의 말로 족쇄를 차는 것은 불행하다. 차라리 모래 위에서 타이어를 끌면 근육이라도 늘텐데 족쇄는 갈수록 발목을 조여 한 걸음 떼기도 힘들게 된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잠시 유체이탈을 해야한다. 지친 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