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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직장 동료의 손과 발에 작은 물집들이 잡혔다. 증상을 검색해보니 한포진과 비슷하다. 통증이 심하지 않아 대상포진은 아닐 것이다. 한포진의 발병 원인은 확실하지 않다. 의사들도 다한증이나 스트레스, 유해물질 노출 등으로 이유를 짐작할 뿐이다. 몸의 표면에 나타난 이 투명한 물집들은 무슨 신호일까? 일을 잠시 쉬고 왕창 놀면 스트레스가 풀려 깨끗이 낫는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혹은 손에 물 묻히지 않게 해 줄 노예를 구하라는 계시 인지도 모른다. 몸속의 무언가가 정상적인 순환을 방해하여 피부에 경고를 남기고 있다. 애인은 한동안 요추 추간판 탈출증에 시달리며 부쩍 예민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까칠해지거나 표정이 매서워지지는 않는다. 그저 시름에 잠겨 청초하고 아름다운 웃음이 줄어들고 있다. 허리에서 느껴지는 ..
숨 막히게 괴로워 문득 인천공항에 간 적이 있다. 공항은 시간 때우기에 훌륭한 곳이다. 우선 구석구석 깨끗하고 쾌적하다. 인기 프랜차이즈 음식점들이 마구 모여있다. 많은 인파에 비해 소음은 견딜만한 수준이다. 어디에선가 시끄럽게 터져나온 소리들이 넓고 높은 공항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우우웅 줄어들어버린다. 피곤하면 어디든 털썩 앉아 쉴 수 있다. 화장실도 발길 닿는 곳마다 준비 완료. 쓰다보니 인천공항이기에 이런 장점을 꼽을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다. 이곳에서 사연 없는 눈빛은 없다. 급하게 출국장을 찾느라 허둥대면서도 들뜬 마음으로 발그레한 얼굴들이 우르르 사라지고 나면 잠든 아이를 업고 지쳐 말도 잊은 젊은 부부가 지나간다. 각양각색의 캐리어들이 요리조리..
헛소리를 나눌 상대가 크게 줄었다. 위험하다. 이러다간 머리가 점점 굳는다. 샌드위치 가게 습격 계획 세우기, 나만의 사이비 종교 만들기, 직접 지은 속담 대결하기 등의 중대사가 논의되지 않은 채 쌓여간다. 헛소리의 주요한 효능을 이해하는 현인과 사귀고 싶다. 하루 30분 정도 헛소리를 하면 스트레스 해소, 창의력과 논리력 향상, 그리고 임기응변 능력도 키울 수 있다. 수십만 직장인들이 지겹도록 겪어왔던 딜레마를 이제야 맛보고 있다. 바로 돈을 버는 대신 포기해야 하는 것이 생긴다는 이다. 모두들 이미 한바탕 떠들어 댄 ‘직장인의 고뇌’ 시리즈. 오랜 한량 생활 끝에 이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되어 아주 감회가 새롭고 가슴이 답답하다. 직장인으로서의 나는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의 바..
슬램폭행에 대한 글을 쓴 뒤에도 한동안 찝찝했다. 그 찝찝함이 싫다. 사실 단순한 일인데. 누가 내 신체를 고의로 때렸고 나는 그게 싫다. 나 같은 피해자가 또 없길 바란다. 그래서 글을 써서 알렸다. 다음 공연에서 동의 없는 폭행이 또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지 미리 알려지길 바랐다. 실제로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이 정도다. 뭐 마이크를 뺐고 공연을 중단시킨 뒤 경찰이라도 불렀어야 했나? 다시 돌아간다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어쨌든 이 찝찝함의 근원에 대해 파헤쳐봐야 속이 시원하겠지. 며칠간 이어진 고민은 그걸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찝찝함의 첫 번째 원인은 이것이었다. 피해를 알리는 과정에서 예민하고 호들갑스러운 사람으로 비칠까 봐 걱정했다. 별 것 아닌 일을 키우는 성가신 사람이라고 여겨지고 싶지..
고독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는 내가 감당하기 힘든 스스로의 변덕 중 하나이다. 혼자가 싫다. 혼자 일어나 혼자 잠들고 싶지 않다. 날 위해 요리해 혼자 먹고 직접 치우고 싶지 않다. 혼자서도 외식과 쇼핑은 곧잘 하지만 역시 한 마디 내뱉고 싶어질 때가 있다. “옳게 된 자본주의라면 이 거지 같은 음식을 내가 먹어줬으니까 돈은 내가 받는 게 맞지 않아?”라던지 “이 옷이 나한테 이 정도로 잘 어울리면 디자이너가 그냥 한 벌 줘야 하는 거 아냐?”같은 말을. 그때마다 받아쳐줄 상대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나 그 역할을 맡아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혼자이긴 싫은데 그렇다고 함께이고 싶은 사람도 없다. 가족들이 있는 집에 가면 불면증에 시달린다.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느니 차라리 혼자 껌을 씹겠다. ..
6월 19일 오늘 저녁 라이즈호텔 15층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여덟명 가량의 남자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아마 그 가해자들은 그 행위를 ‘슬램’이고 ‘공연 문화’ 중 하나라고 변명할 것이다. 슬램은 소위 말해 펑크나 메탈 공연에서 벌어지는 뺑소니 사고이다. 그 이상의 친절한 설명은 하고 싶지도 않다. 오로지 가해자만이 ‘문화’라고 부르는 행위일 뿐이다. 효도앤베이스 밴드 공연 중 마지막 곡이 시작되던 찰나에 갑자기 일고여덟 명의 남자들이 떼를 지어 공연을 즐기던 사람들을 밀쳐내고 가운데로 뛰어들어 마구잡이로 뛰면서 서로에게 몸통박치기를 했다. 앞자리에서 공연을 즐기던 나는 황소처럼 날뛰는 가해자들에게 부딪혔고, 이 정신없는 과정에서 겨우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며 바깥으로 도망쳤다. 밖으로 나와보니 내 앞과 주..
식당에서 주문한 메뉴가 나오기 전까지 무엇을 하며 기다려야 좋을지에 대한 속 시원한 답을 오랫동안 찾아왔다. 카페라면 한결 수월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곳만의 재미있는 인테리어를 하나하나 뜯어볼 수도 있고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뒤적거려도 된다. 애초에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각오를 하고 가는 곳이기도 하고. 그러나 오로지 식사를 위해 방문한 식당에서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주어지는, 짧다면 짧고 (어색한 사람들과 함께라서)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뭘 하면 좋을까. 함께 온 이들을 위해 수저를 놓아주고 컵에 물을 따라 나눠주며 한바탕 부산을 떨고 난 뒤에도 여전히 음식 소식은 요원하다면? 나는 그 답을 에밀 출판사의 『놀라운 리얼 종이접기 2 - 하늘을 나는 생물 편』에서 찾았다. 사각주머니*를 미리 접어..
엄마가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달라고 했다. 사실은 그 말을 미처 꺼내기도 전에 나는 알았다. 부름의 의도에 따라 자신의 목소리 톤과 억양이 세분화되어 있다는 걸 엄마는 몰랐을 것이다.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자마자 그 음파가 뒤이어 주문하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나는 인형술사가 일으킨 목각인형처럼 벌떡 일어나 그대로 현관문으로 뛰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 잡힐 것이 뻔했으므로 한 번에 세네 칸씩 계단을 펄쩍펄쩍 뛰어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으로 빙글빙글 휘감긴 통로 위에서 엄마가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소리쳤다. 야 이 망할 년아 - - - - - 위 기억은 중학생 때의 것으로, 그때의 나는 어떻게든 남이 시키는 것을 하지 않으며 살고자 노력했다. 지금도 직장에 다니고는 있지만 고분고분시키는 대로 따르..
오월이 되기 전에 이사 온 이 작은 마을은 아주 높은 곳에 있다. 마을을 한 바퀴 휘- 돌아 산책 하다보면 저 아래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지붕들이 보인다. 아마 이전에 살던 해방촌보다 여기가 더 높을 것이다. 인구 수는 훨씬 적다. 그래서 훨씬 조용할 줄 알았는데 새소리가 아주 시끄럽다. 우리 집보다 높은 곳에 사는 것도 바로 이 새들이다. 마을버스 없이도 가파른 오르막길을 쉽게 올라와 통풍 잘 되는 나무 위에다 집을 지었다. 아랫동네 지붕들은 눈길만 돌려도 쉽게 구경할 수 있었는데, 이 작은 집은 뒷목을 뻐근해질 정도로 꺾어야 그 바닥만 겨우 올려다 볼 수 있다. 친환경적인 자재로 지어진 이 단독 주택은 형편에 따라 소박하게 지어졌는데, 그마저도 새끼가 크고 나면 텅 비어버린다. 한 때 눈도 못 뜨던 새..
이사 온 동네에서 가장 반가운 건 역시 아카시아 나무다. 출퇴근 할 때 마을버스를 타고 고작 두 정거장을 이동하는 대신, 산을 구불구불 가로지르는 하나의 길을 따라 약 25분 가량을 걸어다니기로 했는데 처음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때는 그들도 조용히 꽃송이를 다물고 있었을 때였다. 그러나 이사한지 일주일이 지나갈 무렵 도저히 코를 킁킁대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진하고 매혹적인 향기가 산 전체에 스며들었고 그제야 이 산 전체에 높이 10미터는 족히 넘을 아카시아 나무들이 서로 손에 손을 잡듯이 빼곡히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매년 피어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두 종의 꽃 중 하나가 이렇게 집 가까이 가득하다니 1.6배 오른 월세가 아깝지 않았다(다른 한 종은 수수꽃다리이다). 아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