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 물린 자국은 희미해져 가고 산책 후엔 옷깃에 나뭇잎이 달리는 계절이다. 어느새 매미들이 입을 다물었다. 뒷산을 타고 노는 새들 중 몇몇은 먼 나라로 떠날 채비를 할 것이다. 트렌치코트 입기엔 낮이 더워 일주일은 더 기다려야 하는 이때, 니트 조끼를 입기로 한다. 뒤죽박죽 날씨에 걸맞은 현명한 선택이리라. 그렇게 흰색 반팔 티셔츠 위에 남색 조끼를 걸치고 집 밖을 나설 때는 당당했으나 한낮의 햇빛에 등허리가 금세 축축해졌다.
가고 싶었던 서점에 업무 상 방문하게 된 덕분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영업하지 않는 날을 대관한 터라 일반 손님도 없었다. 넓고 깨끗하고 조용한 서점 안에서 영원히 헤매고 싶었다. 참지 못하고 책을 사고 말았다. 갖고 싶은 책을 만나면 브레이크를 밟기 힘들다. 읽지 않은 책이 가득 쌓인 작업실이 떠올라도 결국 그 위에 쌓아놓게 된다. 책이 서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주워듣고 꾸준히 주문처럼 외우면서 말이다.
업무가 끝난 후 서점 근처에 사는 H를 불러냈다. 삶의 방향이 달라진 친구, 두 번 다시 볼 필요 없는 친구, 보고 싶지만 물리적 거리가 벌어진 친구 등 삼십 대에 접어들며 사교의 범위와 종류가 한바탕 변화한 뒤 남아있는 몇 없는 친구 중 하나였다. H와는 우연한 계기로 서로 알게 되었는데 이미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 같았다. 이 정도로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은 드물다. 게다가 둘 다 비슷한 단점이 있다. 끈기가 없다. 우리는 포스트잇처럼 여기저기 쉽게 흥미를 붙였다가 쉽게 떨어져 나간다.
세상엔 재미있는 일이 많지만 그걸 전부 누릴 수 없다는 것이 삶의 묘미일지도 모른다. 식물을 키우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도 다 좋지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고 물려받은 돈은 없다. 언제까지고 재밌자고 둘 다를 소진할 순 없다. 어느 시대에 태어나더라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열매를 따거나 벼를 심거나 과일을 팔거나 어쨌든 스스로를 먹여 살릴 노동은 해야 한다. 피할 수 없다면 내가 세운 기준으로 노동하고 싶잖아. 그렇다면 원하는 방식으로 먹고 살 재주를 키워야지. 재주를 키우려면 시간과 인내를 바쳐야 하고. 집을 사고 아이를 키우는 그 대단한 계획 이전에 스스로를 책임지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자신과 어떻게 살 것인지 제대로 합의를 보지 않은 어른이다.
쉽게 도전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세상을 탓하던 내게 누군가 이런 충고를 해줬더라면 어땠을까. 재미있는 일에 도전하겠다는 태도는 좋아. 그렇지만 유의미한 결과를 얻으려면 각오가 필요하잖아. 얼렁뚱땅 도전한 일에서 대단한 결과를 얻을 리 없어. 직장인이 되기 싫으니 자영업자가 되면 그만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한 놈이 직장인보다 열심히 일할 리 없거든. 그렇지만 그때의 내게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들을 것 같지도 않다. 꼰대 같은 소릴 한다고 귓밥이나 파댈 것이다.
H에게 이런 소릴 한참 떠들다 보니 문득 이 모든 것이 그를 위한 말인지 나를 위한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그를 나만큼 걱정하는 따뜻한 마음인지 아니면 그를 엄연한 하나의 객체로 보지 못하는 분별없는 마음인지 알 수 없다. H와 헤어지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엔 덜컥 불안해졌다. 충고랍시고 늘어놓은 말들에 도리어 내가 겁을 먹은 것이다. H 역시 찜찜한 마음만 안고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H가 이제 나와 놀아주지 않으면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