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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1229 금 /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과 연극 <남자들> / 긴개 본문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단박에 이해할 수 없는 제목이다. 내용 또한 서너 번 통독했지만 여전히 어렵다. 누군가 한줄평을 써달라고 하면 끊기지 않는 하나의 문장으로 A4 용지를 전부 채울 것 같다. 오키나와 생활사를 연구하는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가 쓴 이 책은 2016년에 출판되어 2023년에도 팔리고 있다. 작가가 사회학자라고 해서 책을 관통하는 어떤 커다란 사회학적 연구 주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주제와 이론, 표본 같은 것들의 사이로 삐져나온, 이를테면 패딩에서 탈출한 거위털 같은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연구자료를 제공하던 구술자, 일상에서 우연히 알게 된 사람,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들려준, 혹은 자신이 직접 겪은 도무지 일반화할 수 없으며 소설가도 미처 떠올리지 못할 기묘하고 요상한 사건과 생각들을 용케도 모아놓았다. 우연히 짤막한 대목을 읽은 뒤엔 구매하지 않을 수 없었고, 통독한 뒤에는 여러 이에게 권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생각할 겨를 없이 말려든 책이었다.
제목은 ‘~적’, ‘것의’ 같은, 흔히 글쓰기 수업 등에서 빼면 뺄수록 좋다고 가르치는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에도 역시 ‘옥쇄’라던지 ‘~합니다만….’ 같은 일본어 특유의 표현이 많은데 일본인 저자의 책이니만큼 오히려 그 이국적인 느낌을 마음껏 즐겨도 좋겠다. 그러고 보면 번역자도 참 고된 직업이다. 한 언어로 쓰인 이야기를 다른 언어로 옮길 때 저자의 의도를 온전히 가져오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 나라의 언어적 특징을 있는 그대로 살릴 것인지 혹은 그 위에 모국어의 특징을 진하게 덧입힐 것인지 어떤 기준으로 정한단 말인가. 독자로서는 어디까지가 저자의 표현이며 어디까지가 번역자의 초능력으로 옮겨낸 것인지 모호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그것마저 대부분은 저자의 몫으로 공을 돌리고 있으니 번역자란 분명 편파적인 평가를 받는 직업임에 틀림없다. 갑자기 궁금해져 이 책의 번역자 김경원을 검색해 보니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라는 한국어 뉘앙스를 다룬 책에 공저로 참여했다는 이력이 있다. 번역자는 외국어 실력보다 한국어를 이해하는 깊이가 뛰어나야 한다는 그의 말에 동의하며, 기시 마사히코와 김경원의 합작인 이 책을 펼쳐본다.
모처럼 머리말과 맺음말을 꼼꼼히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것을 꼭 전하고 싶다. 독자는 모르는 작가의 지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말 대신 막 표지를 넘긴 사람, 막 책을 덮으려는 사람을 위해 경우 적절한 말을 건네고 있다. 게다가 머리말 앞에는 ‘한국 독자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대목으로 우리를 위한 인사를 따로 남겨두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어릴 적 했던 ‘말 전하기 놀이’를 소개한다. 여러 명이 줄을 서서 한 명씩 한 명씩 말을 전하다 보면 어느새 의미와 내용이 변화해버리며, 그 변화가 주는 의외성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변화에서 파생된 재미가 우리네 사회에서도 여유롭게 받아들여지길 기대하며 국경을 넘어 번역된 이 책 또한 한국 독자들에게 그런 의외성을 가져다줄 수 있길 바란다는 짧고도 재미있는 글이었다. 머리말에서는 이 책이 담고자 했던, 커다란 제목 아래 함부로 구겨 넣기 힘든 이야기들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구술 조사 중 일어난 일을 예로 들고 있다. 선과 악의 캐릭터가 등장하고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뚜렷해 한 번만 들어도 쉽게 알 수 있는 이야기보다 때로는 단박에 이해할 수 없고 오래 생각할수록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는 이야기가 마음속에 더 오래도록 들어앉을 수도 있다. 그것은 왜일까? 마음속에서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는 드문드문 수면 위로 떠올라 우리의 등을 콕콕 찌른다. 그래서 지금은 나를 어떻게 생각해? 아직도 모르겠어? 답은 하나도 아니고 고정되지도 않았다. 맺음말에서는 상호 이해의 까다로움, 고독함, 소중함 등을 싸우는 아이들을 말리느라 난감해진 중학교 선생님 같은 태도로 전하고 있다. 누구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아 조심스럽게, 그러나 따스하게 머뭇거리는 그는 귀엽기까지 하다. 계속해서 새로운 답을 찾게 되는 이야기에 경계를 풀고 매혹되어 보자.
‘따라서 나의 해석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나 에피소드를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범위 안에 들어가도록 분석을 가하지만(이 일도 물론 매우 중요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될수록 그 자체로 소중히 여기자고 마음먹는다. 아니, 오히려 협소한 내 이론이나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야 진정으로 인상 깊은 이야기나 에피소드일 수 있다.’ p.10
읽다 보면 이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점에서(구술자의 주장에 따르면) 경악과 경이가 번갈아 떠오른다. 작가가 조사하고 기록하기 전까지는 세상에 활자의 형태로 공표된 적 없던, 그의 말마따나 ‘헨리 다거’ 같은 사건들이 우리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경우의 수로 존재하고 있다. 하루 동안 내 눈앞을 스친 모든 이들의 삶 중에도 이런 일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목덜미에 오소소 바람이 부는 것만 같다.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청의 매력을 새롭게 느꼈다. 이야기꾼이라면 잘 떠드는 방법 이전에 잘 듣는 법을 익혀야 귀한 보물을 얻는다는 것도.
‘헨리 다거의 인격이나 인생을 완전히 배제하고 그의 작품을 비평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지극히 ‘특이한’ 인물에 의해 그려졌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자칫하면 잃어버릴 뻔했다는 것 자체가 그의 작품이 지닌 가치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만약 오늘날에 헨리 다거가 인터넷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면, 지금과 같은 가치는 없을 것이다. 그가 고독했다는 점 때문에 값이 치붙고 있기 때문이다. 헨리 다거의 고독이라는 서사적 요소에 의해 우리는 ‘2차적 평가’, 다시 말해 아르 브뤼(Art Brut)라는 필터를 통해 그를 열광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낭만적인 서사나 노스탤지어 서사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가장 낭만적이고 노스탤지어인 것은 비비언 걸스를 제작한 본인이 발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도 알지 못한다는 서사다(발견된 것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 p.37-38
그가 취재하던 이 중에는 이런 남성도 있다. 그는 밤거리 뮤지션으로 오사카의 클럽이나 라이브하우스에서 연주를 하다가 이후 여러 장사를 전전하고, 졸부가 되었다가 어느 날은 신흥 종교의 교주가 된다. 지금은 재산을 다 잃고 이제는 아내와 살고 있다. 그는 구술 조사 후 동행한 작가의 아내에게 흔쾌히 자신의 밍크코트를 선물하려 한다. 변변찮은 재산으로 조용히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가 잃지 않는 허영과 객기, 혹은 낙천성과 즉흥성에 작가는 어떤 시선으로 그를 이해해야 할지 쉽사리 정할 수 없다. 또한 작가는 작품성이나 대단한 시사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보통 사람의 블로그나 온라인상의 기록 등을 고통스럽게 읽다가 때로 그 방대함과 고독함, 세속성에 압도되고 매혹당한다. 예술성이나 문학적 가치는 전혀 없는 이 기록들은 관찰하는 동안 일시적으로 작가와 연결되며 단편적인, 그러나 아름다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모든 이야기를 구구절절 소개하고 싶지만 그럴 거면 차라리 책을 직접 선물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여기서는 ‘토우土偶와 화분’ 에피소드를 짚고 넘어가려 한다. 이웃 아파트에 혼자 살던 할머니와의 만남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수다스러운 이웃 할머니는 작가에게 자꾸만 작은 화분을 선물하고, 거절했더니 집 앞에 멋대로 놓고 가기까지 한다. 할머니에게 화도 내보았지만, 어느새 집 앞에 귀여운 화단이 생기고 말았다. 작가는 자기 학생이 고독사를 주제로 아파트 단지 자치회에서 구술 조사를 한 일을 떠올린다. 단지 내의 고독사를 없애려 여러 방안을 고심하고 실시했지만, 남성은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령의 여성에 비해 남성은 친구를 새로 사귀지 못하고 고립된 상태로 지내곤 한다. 실제 고독사하는 경우도 여성에 비해 높으며 고독사 후 발견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훨씬 길다. 반대로 여성들은 화분을 서로 주고받으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를 사귄다. 이 장면을 상상하던 나는 보이지 않는 돈으로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 선물을 보내는 기프티콘 대신 무게가 느껴지는 작은 물건을 손에서 손으로 자주 건네지는 사회를 꿈꾼다.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다면, ‘자, 이야기해 볼까요?’하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을 권하는 편이 좋다.’ p.51
작가는 인간을 향한 특출난 관찰력을 발휘해 아리송하고 애매한 단편적인 사건에서 오래도록 곱씹을만한 생각거리를 쏙쏙 건져낸다. 서로 언제든지 미워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아가는 듯한 우리에게 그의 따뜻한 머뭇거림이 부드럽고 집요하게 파고들길 바란다.
이쯤에서 내가 최근에 본 연극 <남자들>을 함께 소개할까 한다. 우선 연극을 보게 된 계기부터 말하고 싶다. 우리 글방은 주택 단지로 이어지는 골목 1층에 있다. 조용한 동네지만 꽤 많은 사람이 매일 창밖을 지나다닌다. 자세히 보면 어제와 그제도 비슷한 시간에 골목을 지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는 개와 주인들, 비슷한 시간에 나가고 귀가하는 노인들, 하교 시간에 맞춰 우르르 뛰어가는 학생들 등등. 익숙한 얼굴이 늘어나며 점차 평온한 기분이 든다. 아마 번화가 1층에 글방을 냈더라면(임대료 때문에 낼 수도 없었겠지만) 매일 안을 들여다보는 낯선 이들의 시선에 움츠러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는 낯선 인물의 등장이 적다. 내 멋대로 행인들에게 별명을 붙이고 시트콤 속 대가족의 역할을 하나씩 부여하며 내적 인사를 건넨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창밖에서도 나를 알아차린다. 어느 날 생겨난 이상한 공간에 매일 같이 책상에 앉아 뭔갈 하는 수상한 사람.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며 킥킥 웃기도 하고, 노트북으로 뭔가를 가린 채 허겁지겁 먹기도 하는 이 인물에게 행인들도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유리창 하나를 두고 천천히 익숙해지는 우리는 어항 속 물고기와 주인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 물고기이고 어느 쪽이 주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 재미있다.
종종 글방에 나의 개 란마를 데리고 왔는데 처음엔 낯설어하던 란마 역시 창밖의 사람들과 천천히 데면데면해졌다. 지나가는 학생 중에는 란마가 글방에 없는 날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아쉬워하는 웃긴 애도 있었고(키가 180은 되어 보였다), 산책하던 자기 개에게 란마를 가리키며 인사를 나누게 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란마를 만져보고 싶다고 칭얼대기도 했는데 유리창 하나를 두고 그 소리가 전부 똑똑히 들려왔기 때문에 어느 날엔 란마를 데리고 나가서 아이들과 인사를 시킬 때도 있었고, 어느 날은 란마가 없어 아쉬워하기에 대신 간식을 건네기도 했다.
엄마가 글방에 놀러 와 이야기를 나누다 점심을 먹으러 간 날,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만난 인물이 나를 붙들더니 말을 걸었다. 지난번 간식을 받아 간 아이들의 보호자였다. 우연한 만남에 서로 반가워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는 갑자기 연극표를 두 장 건넸다. 가까운 극장에서 열리는 연극의 극단 관계자라고 했다. 쌀과자 두 개를 연극표로 돌려받아 얼떨떨하면서도 기뻤다. 몇 달 전부터 연극을 보고 싶던 참이었다. 바쁘기도 하고 어떤 작품을 골라야 할지 몰라 계속 미루기만 했는데 이렇게 삼신할매 점지하듯 만난 연극이라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제목은 <남자들>. 작가 겸 연출가 이와이 히데토의 작품인 <남자들>은 역시 연출가 겸 배우 김현회를 주축으로 하는 극단 위대한모험에서 제작했다.
연극 관람은 십 년 전쯤이 마지막이었다. 연극의 장점이라면 바로 눈앞에서 배우들의 살아 숨 쉬는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이리라. 그렇지만 사실 나는 그 배우들이 이리저리 무대 뒤로 뛰어다니는 모습, 후다닥 의상을 갈아입는 모습, 어둠 속에서 미리 바닥에 붙여둔 표시를 따라 이동하는 모습 등에 더 신경이 쓰여 작품에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이 순간 이 조명을 켜려면 조명 감독과 어떻게 상의하고 연습했을까, 음악은 누가 만들었을까, 배우들은 저 무대 뒤에서 어떤 대화를 나눌까, 의상과 소품을 준비하는 사람도 배우로 참여하고 싶지 않을까 같은 생각의 곁가지들을 무럭무럭 키우는 이런 사람은 아마 연극과 잘 맞는 관객은 아니겠지. 열정적으로 연기 중인 배우들에게 미안해져 되레 내가 감명받은 연기를 하려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역시나 이번에도 배우들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 순식간에 갈아입은 옷의 종류 등에 시선을 뺏겼다. 그래도 십 년 전보다는 집중할 수 있었다. 내용은 이렇다. 네 남자가 지지리도 고단한 삶을 살았다. 일은 힘들고 직장에서 인정받으려 애쓰다 보면 가족에게 외면받는다. 자신의 실수로 직업을 잃기도 한다. 여자에게 차이거나 미움을 받는다. 다들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 나이가 들어 돌아보니 바보 같기도 하고 후회도 있다. 여기까지는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로 신나게 감상할 수 있었지만,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이미 오래도록 떠들어지지 않았던가. 남성의 외로움, 남성의 어리석음, 남성의 피치 못할 사정, 알고 보니 사랑받고 싶었을 뿐인 가여운 남성 등등…. 나이 들어도 청춘이 되고 싶고 바보 같은 짓을 좀 해도 귀엽게 봐주었으면 하는 남성의 목소리를 인제 와서 또 누구에게 전하고 싶은지 궁금했다. 내가 이 연극을 보고 밖으로 나가 지나가는 중년과 노년의 남성들에게 애틋한 눈빛을 보내길 바라는 건 아닐 텐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도대체 뭘까 고민하는 와중에도 연극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그러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 와서야 이 연극의 빛나는 순간이 드러난다. 네 인물 중 그나마 멀쩡한 상태로 노인이 된 한 남자는 자기 부인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전까지의 그들은 행위자, 능동자, 주인공이다. 주변 인물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거나 한 발짝 더 나아가 엮이려 하는 대신 자기 삶을 살아내느라 여념이 없다. 철없는 정신을 가진 채 더 이상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신체에 갇혀 괴리에 허우적대던 그는 극 중 처음으로 부인의 삶으로 따라 들어간다. 부인에게는 새로운 친구가 가득하다. 그들은 공통의 목표를 세우고 빛나는 눈빛을 뽐낸다. 컬러풀하고 활기가 넘치는 부인과 친구들은 낯선 인물에게 함께 무언가를 성취하자고 제안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그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말이다.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연결되는 순간 그의 고독과 불안은 처음으로 희망의 실마리를 얻는다.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의 ‘토우土偶와 화분’ 에피소드에서 작가는 여성들이 작은 화분을 주고받으며 고독사를 피할 뿐만 아니라 일상의 안온함을 지켜내는 것을 관찰한다. 연극 <남자들>에서 마지막 노인은 부인의 일상을 관찰하고 거기에서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배운다. 이 부분이 있었기에 <남자들>은 그저 삶의 괴로움을 전시하고 곱씹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관객에게 연극이 끝난 뒤 떠들어볼 만한 주제를 제공할 수 있었다. 두 작품 모두 일본인 남성이 작가라는 것과 여성의 연대를 관찰하며 희망을 찾으려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여러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이것만이 책의 결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중요한 발견이다. 남성들이 노년의 고독과 싸우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지 않은가. 여성처럼 연대하고 여성과도 연대하고 여성의 삶 속에서 배울 점을 찾는 남성들이 그렇지 않은 남성보다 훨씬 더 더불어 살기 좋은 사람일 것이다.
우리 동네 할머니들은 매일 정자에서 모인다. 그들은 함께 몰려다니며 노래를 배우고 손뼉을 치고 음식을 함께 만들어 나눠 먹는다. 반면 할아버지들은 술에 취해 밤길에 오줌을 누고 꽁초를 주워 조금 피다가 들어가는 모습이 드문드문 개별적으로 관찰된다. 저러다 큰일 나겠는데 싶은 순간들도 많다. 할머니들은 왜 할아버지들을 안 끼워주는 걸까. 할아버지들은 끼어서 같이 놀고 싶지 않을까? 할아버지 혼자서 놀면 재미있을까? 할아버지끼리는 왜 매일 모이지 않을까?
연극을 본 뒤 엄마에게 연락해 표를 예매할 테니 연말에 아빠와 둘이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아빠가 늦기 전에 이 연극을 보길 바랐다. 아빠가 자신의 고독을 여기저기 푸념하지도 못하고 투덜이 노인이 되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어렸을 땐 부모가 아이들에게 친구를 사귀게 해 주려 노력했는데 이젠 반대가 되었구나. 아빠가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해 주려면 무엇을 지원해야 좋을까 고민해 보았다. 이제야 효도의 스펙트럼에서 좀 더 효녀 쪽으로 기울고 있지 않나 싶은, 아빠가 들으면 기가 차 혀를 내두를 생각을 하는 삼십 대의 딸. 그러나 엄마는 연말까지 아빠와 함께 사람들을 만나러 다닐 예정이라 바쁘다고 했다. 알고보니 아빠는 일 년 전에 퇴사한 회사의 회식에도 꾸준히 불려다니는 아주 대단한 사교적인 인물이었다. 눈치 없이 아빠가 끼어든 거 아냐? 했더니 아유 아냐, 얼마나 다들 사이가 좋았는데! 하고 엄마가 손사래를 쳤다. 중년 남성이라는 틀로 아빠를 납작하게 눌러 대충 훑은 사람이 바로 나였구나. ‘딸년아, 너나 잘하세요.’ 멀리서 아빠의 비웃음이 들린다,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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