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다 읽었다고 말해선 안 되는 책, 마리아 투마킨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2023) (원제: Axiomatic) 본문

독서 기록

다 읽었다고 말해선 안 되는 책, 마리아 투마킨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2023) (원제: Axiomatic)

긴개 2024. 9. 21. 18:14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을 ‘다 읽었다’, 혹은 ‘잘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을 경계하라.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 틀림없으니까. 이 책은 그렇게 쓰이지 않았다. 페이지를 술술 넘긴 뒤 탁 덮을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그래선 어떤 실마리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단박에 모든 상황이 눈앞에 선명히 그려지고 메시지까지 명확히 전해버린다면 이 모든 증언은 허사가 되어버린다. 마리아 투마킨의 위대함은 이 의도적 위장에 있다. 4장 ‘내게 일곱 살이 되기 전의 아이를 (···)’에서 투마킨은 ‘스테가노그래피 steganography’를 설명한다. 이 단어는 ‘메시지 자체를 숨기는 기술’을 뜻한다. 비밀 메시지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비밀이라는 뜻이다.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은 수많은 증언과 사람을 다루고 있지만 절대 그것들을 보기 쉽게 타임라인대로 ‘정리’하고 ‘요약’한 다음 그 ‘의의’를 들려주지 않는다. 이 모든 사건들은 그저 갑자기 일어났고,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흐른 뒤라고 해도 그것을 균형 있게 통합적으로 볼 수 있는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래서도 안 된다. 정리와 요약은 우리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이 아니다.
 
 책 소개를 위해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고 정리할 수밖에 없는 나를 저자가 이해해 주길 바란다. 혹은 그의 말마따나 이해란 영원히 불가능하기에, 차라리 용서를 빌겠다.
 
 
 1장 ‘시간은 모든 상처를 치유한다’부터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는다. 누군가 손가락을 목구멍에 집어넣어 토해낸 문장들이 가득 쌓여있다. 프랜시스, 케이티, 브린, 모니크, 리사, 앤, 어맨더 등 각기 다른 사건에 연루된 여러 인물이 두서없이 등장하는데 이중 누군가는 자살한 학생이거나 그를 가르쳤던 선생, 혹은 그의 가족이다. 자살 청소년이 남긴 말과 일화, 그것에 매여있는 가족, 그다음 날에도 여전히 같은 반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선생의 시선이 겹겹이 쌓인다. 주의할 점은 바로 이 사건들에서 공통점을 찾는 것이다. 타임라인을 정리하며 자기도 모르게 이 사건이 ‘끝’나는 순간을 예측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비슷한 일을 겪었기에 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사자들도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일은 언제 끝나는지,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 전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일을 겪은 가족 구성원들끼리도 그 일을 대하는 생각이 전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건 대부분 자기만족에 가득 차있을 때뿐이다.
 
 p.19 “11학년 아이들한테는 글로 쓰고 싶은 정말로 특별한 일이 있다면 12학년이 될 때까지 아껴 두라고 해요.” 앤은 말한다. “그때가 돼서 어떤 진실에 관해 글을 쓰면 그 일이 글이 되어 나오거든요. 그리고 아이들 대부분은 정말로 그걸 그때까지 아껴 둔답니다.”
 
 p.62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실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은, 자살에 대해 숨김없이 이야기하는, 다시 유행하고 있는 이런 태도가, 이런 두려움의 부재가, 너무도 새로워서 금방 칠한 페인트 냄새가 날 지경이라는 것이다.
 
 사건을 신속히 극복하거나 치유, 봉합하려는 목적을 세우고 ‘정신 건강’을 돌보는 일은 어쩌면 개개인에게 일어난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방법론인지도 모른다. 혹은 단지 사람들이 그 사건에 관심이 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2장 ‘과거를 망각하는 자들은 그것을 되풀이하는 형에 처해진다’만이 단 하나의 사건을 다룬다. 그러나 그 ‘하나’의 사건 뒤에는 너무나 많은 원인과 구멍이 섞여있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고 있는 당사자인 ‘여자’조차도 이 사건을 전부 알기 어렵다. ‘나는 여자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걸 믿을 수가 없다고.’(p.141) 바르샤바 홀로코스트의 아동 생존자인 ‘여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 온 뒤 자신을 구원했던 ‘구덩이’를 엄마와 새아빠에게서 도망쳐 나온 손자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 사회는 이에 경악한다. 구원은 감금과 학대가 되어 ‘여자’를 파렴치한 아동 탈취범으로 복역하게 만드는 동안 세간에 가려진 새아빠는 다시금 아이들에게 그 손길을 뻗친다. 여기에는 ‘여자’의 집, 섣부른 정의 구현, 보험금 액수 등이 끼어들어 조모에게서 손자를 더욱 떨어트려 놓게 만든다. 190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선주민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떼어 낸 뒤 백인 위탁 가정이나 아동 보호 시설에 강제로 입양시킨 정책을 추진한 적 있던 바로 그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여자’의 진위를 믿지 않는다. ‘이 사건을 둘러싼 의도적인 무지. 이것은 제도의 실패이며 문화의 파산이다.’(p.135) 이 모든 일을 겪으며 ‘여자’는 남들과 다른 것을 본다.
 
 p.140 여자의 두 눈은 눈물이 가득할 때조차 세상을 속속들이 파헤치고 있고, 동시에 저 멀고 외진 곳까지 다 바라보고 있다. 울고 있을 때조차 그 두 눈동자는 인간이 겪어야 하는 그 바닥 없는 시련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3장 ‘역사는 반복된다’는 세 부로 나뉘어 있다. 1부에 등장하는 벤더는 일생동안 한 번도 만나기 힘들 유형의 인물이다. 그는 법정에서 무례하게 구는 마약 중독자, 알코올 중독을 겪는 홈리스, 소아 성애자로부터 길러진 사람, ‘우주적인 외로움’을 겪는 사람, 길거리 성매매자 같이 ‘타르 구덩이에서 태어난’ 이들을 변호한다. 물론 이런 이들을 돕고자 하는 대중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의 연민은 ‘동일시를 통한 공감’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갖고 태어난다. 따라서 돕고 싶은 마음이 드는 대상에게 더 몰두하거나, 혹은 돕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그 대상을 기호화, 상징화, 우상화해 버린다. 이 폭력적 변환과 의뢰인들의 악순환에 아랑곳하지 않고 벤더는 반복을 통해 미래로 나아가고자 한다.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여겨지던 반복이야말로 삶의 기본 형태라고 이해한 순간부터 그는 더 확고하게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p.169 밴더의 의뢰인들이 살아가는 삶을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들은 대개 고속 도로 위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지나가는 트럭들에 반복적으로 치이고 있다고 말이다. 상처에 붕대를 감고, 빗물에 씻어내고, 뼈를 관절에 도로 맞춰 놓는 도중에 또 다른 트럭이 다가온다. 그러면서 여러 건의 부상은 미처리된 채로 남게 된다. 미처리된 부상이 삶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은 미처리된 슬픔이 삶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과 같다.
 
 p.212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 불운을 겪었다는 점 때문에 그들의 도덕성을 실제보다 고결하게 평가하고, 그럴 때만 (같은 인간으로서) 분노할 수 있다면 ······ 글쎄, 그건 정말이지 슬픈 일이다.
 
 3장 2부는 성인이 된 우리가 얼마나 부모의 삶을 반복하고 있는지 묻는다. 자녀가 부모에게서 온전히 분리된 채 살아갈 수 있을까? 만약 부모가 ‘삶 속에 심어져 있던 원형’으로 우리에게 남는다면, 자살한 부모는 어떨까? 병에 걸려 죽은 부모는 어떨까? 자식들은 부모가 자살한, 혹은 병으로 죽은 나이가 되기까지 운명의 탈을 쓴 망령에 시달린다. 자신에게도 동일한 결말이 닥칠까 봐 두려워하거나 우울에 삼켜진다. 혹은 일상적으로 그 일을 떠올린 적 없음에도 ‘매복 공격’을 받듯 그 일로부터 덜컥 뒤통수를 맞는다.
 
 p.230 그런 믿음 속에서 살아가던 그는 어느 날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상황이 충분히 나빴던 까닭에 그는 ‘그 일’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자살하고 싶다는 욕구가 전혀 없음을 깨달았다. 그게 그가 마침내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그곳에 직접 도달해 스스로 알게 되는 것.
 
 3장 3부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매우 짧으므로 직접 읽기를 권한다. 다만 아래의 문장이 너무나 매혹적이고 소름 끼치며 믿기지 않으므로 옮긴다.
 
 p.252 과거가 그를 찾아냈다. 과거는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그를 붙잡은 다음 그 자신의 가족사라는 소용돌이 속에 쑤셔 넣었다. (···) 그때 그것은 마치 소용돌이 같다.
 
 
 4장의 제목은 ‘내게 일곱 살이 되기 전의 아이를 데려다 달라, 그러면 그 아이가 자라서 어떤 여자가 될지 알려 주겠다’이다. 이 격언의 기원은 예수회로 당연히 원문에는 ‘어떤 남자’로 실려 있다고 한다. 그러나 원문은 일단 집어치우고, 우리는 정말 한 사람의 유년기에서 앞으로의 인생 전체에 대한 힌트를 찾을 수 있을까? 이를 두고 에바 호프먼 Eva Hoffman은 사춘기 이전에 우리가 겪는 사건 가운데 몇몇은 ‘바늘’이 되어 ‘우리의 살을 뚫고 들어’ 간 다음 ‘다시 빼낼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라오스를 탈출하다가 태국 난민 수용소에 갇히고 이후 오스트레일리아로 탈출한 나지 추는 베트남 요리 식당을 운영하고 성공한 사업가가 된다. 이 전후의 사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 명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나지 추와 함께 수용소를 탈출한 가족들이 전부 사업가가 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고난 것이 자신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그는 믿는다. 천성과 양육 중 무엇도 우위에 올려두기가 어렵다. 그래서 투마킨은 ‘우리는 무척 많은 걸 알고 있지만, 그 앎들을 하나의 체계 안에 매끄럽게 정리해 넣을 수는 없다는 사실’(p.281)을 떠올린다.
 
 책을 덮을 때쯤이면 베라의 이름이 마음속에서 길게 늘어진다. 4장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의 이야기는 토막 난 채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 그는 폴란드 감독 로만 폴란스키와 전후 바르샤바에 남아 농담을 나누었던 사람이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구덩이에 숨어 지내며 바퀴벌레를 사랑하게 된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가 약을 먹고 자살할 수 있도록 물 한 잔을 떠다 준 사람이다. 과연 그럴까? 그는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때로는 이야기하고 때로는 그것을 멈춘다. 바르샤바는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유태인이 약 35만 명 이상 사는 도시였다. 전후? 고작 1만1천5백여 명이 남는다. 그곳에 베라가 살았다. 살아남았다. 투마킨은 몇 해 동안이나 베라의 이야기를 옮기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럴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에 기뻐한다. 이런 부류의 이야기는 ‘이야기할 수 없음’이라는 특성을 지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함부로’라는 단어마저도 많은 논의를 급하게 뛰어넘어 버린다. 당사자마저도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도록, 혹은 말하지 않도록 강요받는다. 그것은 마음속에서, 과거에서, 살아남은 순간에서부터 비롯된다.
 
 p.310 베라는 살아남기 위해 잡초를 먹어야 하는 “홀로코스트 다이어트”라는 게 있다고 무표정한 얼굴로 언급한다. 사람들이 후련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다.
 
 p.314 나는 소피에게 내가 베라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이유를 말해 주었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증언들은 언제부턴가 안전해 보이는 공간으로 들어섰는데, 베라와 그의 이야기 속에 있는 무언가가 그 공간을 다시금 위험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위험한 것이 옳게 느껴진다고, 나는 말했다.
 
 p.331 “하늘을 날아가는 두루미보다는 손안의 박새가 낫다.” 이 말은 영어로는 기묘한 말처럼 들리지만, 러시아어로는 흔한 표현 중 하나다. (···) 이 속담을 영어로 하면 “손안의 새 한 마리는 숲속의 새 두 마리만큼의 가치가 있다”가 된다. 인간의 삶에 관해 쓰는 사람은 종종 그것이 (다른 사람의 삶이) 자신의 손안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글을 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인간의 삶은 언제나 숲속의 새 두 마리다. 다시 말해 그것은 포착(타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일을 가리키는 단어는 언뜻 보기에는 친절하게 느껴진다) 할 수 없고, 완전히 이해(타인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일을 가리키는, 마찬가지로 겉으로만 친절한 표현이다) 할 수도 없다. 그런데 그 삶이 아동 생존자의 삶이라면? 숲속의 새 네 마리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의 연약함이 무지와 무능력이 아닌 인지와 능력에서 온다는 것을 모를 때가 있다. 4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폴 발렌트는 겨우 네 살 때, 살아남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정확히 이해했고 그 뒤로 3년 동안 한 번도 그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 베라 역시 구덩이에 들어가며 ‘아이이기’를 멈춘다. 자신의 생명을 책임지기 시작한 뒤로 그들은 두 번 다시 아이로 돌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덕분에 살아남았다. 어른들은 아이가 순수함을 잃는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아이들은 순수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어른들이 그런 것처럼. 홀로코스트와 아동 성범죄, 학대에서 살아남은 아이에게 순수성을 잃었다고 아쉬워하는 눈빛을 보내는 태도는 생명보다 귀한 것이 따로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5장 ‘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다’는 추측하자면 돌이킬 수 없는, 이어갈 수 없는, 답할 수 없는 대화들의 모음이다. 돌아오지 않는 답변 때문에 누군가의 통화를 엿듣는 듯한 답답함 뿐만 아니라 섬뜩한 불안이 커져간다. 어떤 말은 밝고 명랑하며 어떤 말은 그 말을 들어야 할 상대방이 너무 보고 싶어 진다. 페이지를 이리저리 넘기다 결국 시선을 뺏기게 되는, 말들, 댓글들, 편지들. 모르겠다.
 
 절대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그러라고 쓰이지도 않았다. 우리는 예전과 지금, 미래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만큼이나 타인에게도 그렇다. 아마 훨씬 더. 아무리 가깝고 친밀한 사이라고 해도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말은, 내가 평생 누구에게도 절대 이해받을 수 없을 거라는 정언이다. 그걸 곱씹다 보면 잠시 아득하게 외로워진다. 그건 동시에 끔찍하게도 공평한 말이다. 그저 서로의 말을 듣고 또 듣는 것. 그걸 뛰어넘는 방법이 앞으로도 발명되긴 힘들 거라는 생각. 그리고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결국 봐야겠다는 생각. 드문 일이다. 나는 지금껏 그런 영화를 성실히 피해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