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존 오브 인터레스트 The Zone of Interest>가 절대 말하지 않는 것. 본문

독서 기록

<존 오브 인터레스트 The Zone of Interest>가 절대 말하지 않는 것.

긴개 2024. 9. 21. 18:19


 
 
마리아 투마킨의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을 
읽은 후, 한동안 어떤 얼굴들이 마음 속에 불쑥불쑥 
떠올랐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이들의 눈에는 영영 
빠져나올 수 없을만큼 기나긴 터널이 있었다. 
​저 멀리 별처럼 작게 깜빡이는 빛만이 유일한 
이정표인 곳.
 
영화관은 즐거운 장소가 아니다. 문이 닫히고 
어두워진 극장에 자리를 잡으면 시트는 묵혀둔 
곰팡내를 풍긴다. 밝은 조명 아래에선 있는 줄도 
몰랐던 주변 사람들은 어둠이 깔린 뒤 강렬한 
소리와 빛, 냄새로 자신을 증명한다. 눈 앞에서 
영화라도 틀어주지 않았다면 절대 자진해서 갇힐 
리가 없는 곳이다. 그런 장소에서 홀로코스트 
​영화를 관람한다는 게 어떤 공감각적 효과를 줄지, 
굳이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지. 그래서 가능하다면 
피해왔다. 이번엔, 제발로 찾아왔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아름다운 일상이 잔잔하게 흘러
간다. 파스텔톤으로 정돈된 부드러운 화면 속에서 어린
아이들과 젊은 부부는 안온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집은
얼룩 하나 없는 흰 천과 우아한 가구로 장식하고 고르게
페인트를 칠했다. 색색의 꽃으로 가득한 정원에는 넓은
수영장이 있고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는 동안 어른들은
스윔벤치에 누워 햇빛을 온몸으로 즐긴다. 일견 이 모든 
풍경은 독일 장교 루돌프의 아내 헤트비히의 말대로 
'완벽한 집'이거나 헤트비히의 엄마 리나 말대로 '낙원'
처럼 보인다. 
 
루돌프는 아이들을 카누에 태우고 강에 놀러가는 좋은 
양육자이자 자신이 키우는 말에게 다정하게 인사하고 
라일락을 함부로 꺾지 말라고 안내 방송을 하는 동식물 
애호가이다. 동시에 맡은 일을 잘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성실한 일꾼이다. 어찌나 고민에 열중했던지
그만 나치 장교들과 그 가족이 가득 모인 커다란 파티장
에서도 외따로 다니며 표정을 풀지 못한다. 이런 층고
높은 장소에서 다수의 인원을 효과적으로 몰살하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돌프는 21세기의 
회사 직원들이 개인의 능력을 입증하기보다 여가시간의 
확보에 더 몰두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코웃음칠 사람
이다. 그 대단한 유태인 말살 작전에 자기 이름이 붙자 
루돌프는 기쁜 마음에 제일 먼저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비록 아내는 '회스 작전' 이야기에도 졸려 시큰둥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요구에 
성심성의껏 부응한다. 
 
 
 
 

헤트비히가 루돌프와 떨어지면서까지 떠나려 하지 않는 
이 낙원 같은 집 담벼락 너머에선 하루종일 어떤 일이 
바쁘게 벌어지고 있다. 영화는 끝날 때까지 그 너머를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이따금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목구멍을 칼칼하게 만들어 기침을 피할 
수 없게 만들 때도 있다. 영화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알려고 하지 않았던, 이 모든 상황을 보고도 못 본 척 
했던 수많은 독일인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어른들은 누군가에게서 옷과 귀중품을 뺏고 아이들은 
누군가의 이를 갖고 놀거나 가스실을 흉내내 온실에 
서로를 가두지만 아무도 그 상황이 끔찍하다거나 
뭔가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미 수천 수만 번 
인용되었던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그것은 순전한
무사유였다. It was a sheer thoughtlessness."
이 코트와 립스틱, 옷, 이의 주인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이 모이고 쌓여 단단해진 뒤 누구도
부술 수 없는 높은 벽을 쌓고 보이지 않는 곳에 그들을 
몰아 넣었다. 벽 뒤에서 그들이 생과 사를 오가는 동안 
아름다운 집에 사는 가족들은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편 관객은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담벼락 너머를 
상상하게 된다. 비명과 고함, 총 소리가 관객을 놓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 저 뒤에 많은 인원이 모여 
있다. 또한 원하지 않는 상황에 놓여 있다. 대단한 
상상력 없이도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의 음악은 우리를 의자에
붙들고 옴싹달싹 하지 못하게 만든다. 찾아보니
역시나 각종 영화제에서 음향상을 쓸고 있다고 한다.
 
 
 
 
 
 
영화관을 겨우 탈출한 뒤, 또다른 홀로코스트 영화
<조조 래빗 Jojo Rabbit>을 떠올렸다. 그 영화가 끝날 
땐 얼굴을 찌푸렸었다. 유치해서 짜증났다. 히틀러의 
억지스러운 연기는 웃기지도 않았다. 그 영화가 왜 
그렇게 싫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조조 래빗> 
이후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을 읽고 그 다음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본 덕분이다. 셋 중 하나
라도 빠졌다면 부족했을 것이다.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에 등장하는 아동 
생존자 베라는 이렇게 말한다. 
 
p.341 "우리가 은신에 들어갔을 때," 베라는 내게 
말한다. "난 아이이기를 멈췄어요. 나 자신의 생명, 
나 자신의 존재를 위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이해했죠." 
 
p.343 생존자는 살아 있는 동시에 죽은 상태로 
지내는 법을 배운다. 그중 아동 생존자는 특수한
종류의 생존자로, 그들은 이중적인 태도에 있어서
는 전문가다. 특히 베라처럼 은신해 살아남은 아이
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범주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전쟁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뒤, 비키 고든은 
은신해 살아남은 아동 생존자들 - 고든 자신의
부모님 역시 여기에 속했다 - 을 인터뷰하면서 어떤
'차단의 감각'을 알아챘다. 그가 인터뷰한 사람 중
많은 수는 수시로 사무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어떤
건조함, 다시 말해 '심리적 깊이'의 부재 같은 것도 
느껴졌다. 가끔 인터뷰 상대가 아이로서의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면 - 연민 가득한 어른이 아이를,
자신이면서 자신이 아닌 그 아이를 바라보면서
힘겨운 감정을 느낄 때면 - 여러 감정이 터져 
나왔지만, 그건 아이가 아닌 어른의 감정이었다.
은신해 있는 아이들은 조용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 계속 머물러 있음으로써 살아남는다. 어떤
도움도 요청하지 않음으로써, 울지 않음으로써,
절대 울지 않음으로써, 어떤 감정이든 느끼게
되면 그간 비축해 두었던 심리적 강인함이 곧장
고갈되어 버릴 수 있었다. 
 
 
<조조 래빗>에서 어린 조조와 그의 집에 숨어
지내던 유태인 소녀 엘사는 전쟁이 끝난 뒤
그렇게 그리던 대로 집 밖에 자유롭게 나가
서로를 쳐다보며 갑자기 춤을 춘다. 자유가
곧 춤이고 그들의 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도 없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나는 이 장면이
유독 억지스럽다고 느꼈다. 이제 다시 어린아이
다운 명랑한 마음을 곧바로 되찾았다는 뜻인가?
전쟁이 끝나면 우리 모두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의 우리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는가? 어린이는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능력이 충분하지 않은가?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p.349 순수함······ 아이들을 규정하는 특징이 
​순수함이라고, 정신적 외상이 아이들에게서 
빼앗아 가는 게 바로 그 순수함이라고 이야기
한다는 건······ 나는 오스트레일리아 철학자인 
조앤 포크너Joanne Faulkner가 순수함을 대하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포크너는 순수함에 관해서는 
세 가지 커다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 문제, 
'순수함'은 자기중심적 어른들 자신을 위한 판타지다. 
두 번째, 순수함은 어른들이 더 이상 그것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여겨지는 아이들을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아이들이 윤리적인 
삶, 시민으로서의 삶에 동참하지 못하게 막는다.
 
 한편 순수함에 대한 베라의 견해는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아이
들이 보통 죽음을 일시적이고 되돌릴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고, 아이의 의식은 죽음의 영속성을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르비우 게토
의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아침에는 살아 있던
사람이 오후가 되면 죽을 수 있다는 걸 안다."  
아이들도 안다.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위기를. 
친구가 죽고 가족이 죽고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리고 두 번 다시 이전의 아이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은 비극이 아니다. 그저
생존 가능성을 더 확보한 한 명의 사람이 된 것
뿐이다. 그런 일을 겪고도 당사자가 여전히 순수
하고 귀여운 어린이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생각은 
지나친 착각이자 부질없는 환상에 가깝다.
 
 
 
 
 
<조조 래빗>은 그러한 착각과 환상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히틀러에게 지나치게 많은 대사를
주어버렸다.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대상을 깊게
미워하지 못한다. 깊게 미워할 수 있도록,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희화화하는 것도 
정도껏 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조 래빗>의
히틀러는 너무 멍청한 나머지 연민을 불러일으키
기도 한다. 그러한 여지를 굳이 줄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적을 그렇게 우스꽝
스럽게 멍청한 놈으로 만들어버리면, 그런 놈
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순수함을 버리고 
두 번 다시 그 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생존자들
마저 바보로 만들어버린다. 뭐 저런 놈한테
살아남는 게 어려운 일이었겠어-하고. 희화화의 
잘못된 용례였다고 생각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서술' 대신 '묘사'로 
홀로코스트를 다룬다. 생존자의 표정을 일일이 
보여주고 나치의 못된 모습을 극적으로 부각
시키는 '말하기-서술' 방식 대신 '보여주기-묘사'로
일어났던 일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이 경우 
'말하기-서술'에서보다 관객이 스스로 판단하고 
심각성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더 제공할 수
있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는 '말하기-서술' 방식이
효과적일 수 있다. 이 모든 일을 생생하고 끔찍
하게, 모두에게 널리 알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직 어제 일어난 것처럼 눈 앞에 그려지는 
사건을 덤덤하게 말하기란 불가능하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난 다음 오랜 
시간이 흐른다면 '보여주기-묘사'가 가능해진다. 
이 때도 여전히 '말하기-서술'로 표현하다보면 
사건은 여러 비극 중 하나에 속하며 평범하거나 
익숙해진다. 혹은 하나의 장르가 되어 이미 아는 
일처럼 예측 가능하게 되어버린다. ​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의 저자 마리아 
투마킨은 이 비극을 익숙한 것으로, 말하기 
용이한 것으로 만들지 말자고 말한다. 누구든 
쉽게 말하고 언제든 말할 수 있는 태도는 사건을
진실로 이해할 수 있게 돕지 않는다. 그 반대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우리는 어떤 사건을
영원히 그 일부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함부로 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 당사자
마저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전부 이해할 수
없다. 정보를 독해하며 최대한 상상하고 짐작
하는 것이 한계다. 
<조조 래빗>이 불편하고 <존 오브 인터레스트>
가 두려웠던 이유를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에서 찾을 수 있었다. <존 오브>가 시작하자마자 
나는 계속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마저도 어느
순간엔 그쳐버렸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이
비극에 익숙해진 것이다. 유태인인 감독 조나단 
글레이저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존 오브>로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하며 '그들'이 아닌 '우리'의
잘못을 이야기한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점령에 오용되는 것을 
반대하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 Jonathan Glazer  2024. 5. 29.
  challanfilm Youtube channel
 
 
'말하기-서술' 방식에서는 화자가 자신과 그 사건을 
떼어놓고 생각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보여주기-묘사'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홀로코스트 
주제의 영화를 만든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유태인의 
가자 지구 학살에 대한 경종을 울릴 수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영화와 그 감독의 언행이 일치하는, 
간만에 영화관 가서 봐야하는 영화였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The Zone of Interest>가 절대 말하지 않는 것.